#39. 영하의 날씨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백두대간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밤 바람이 회오리를 이루며 텐트를 미친듯이 때렸다. 거센 바람소리에 묻혀 개 짖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춥고 어두운 산에서 나는 큰 소리로 울었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질러대는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곤 한 시간만에 다시 잠이 깨어버렸다. 어느덧 미친 바람은 멈추어 있었고 밤새 짖던 개도 잠이 든 모양이다. 텐트 입구를 열었다. 달이 환했다. 보름에서 나흘 지난 달은 하늘 한복판에 떠 있었다. 텐트에 누운채로 눈 앞 정면에 달이 보였다.
이런 밤이면 귀신이 나타날만도 한데. 귀신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무덤 가까이 터를 잡아도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세 살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엄마였다. 초등학생때 어떤 꿈을 꾸고싶은지 선생님들이 질문을 하면, 나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엄마를 만나는 꿈' 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꿈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꿈에서조차 엄마를 만나지 못했고 이 깊고 서늘한 산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귀신을 만나면, 귀신을 만나기만 하면, 그 원혼이 누구든 상관없이 나의 엄마로 여기고 싶었다. 귀신을 붙잡고 울고 싶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단 하나의 소원만 이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 소원은
귀신이 나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나를 저승동무 삼아 데리고 가 주길 원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귀신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귀신은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섯시 반에 겨우 겨우 잠이 들어 7시에 일어났다. 밤과 새벽을 통틀어 2시간 반 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근만근인 어깨보다 더욱 무거운 것은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새벽의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밥을 끓이고 침낭을 개고 텐트를 접고 배낭을 싸고, 그 모든 행동에 나의 시선은 없었다. 초점없는 눈으로 멍하니 그저 매일의 할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밥을 끓기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동안 추위가 등을 타고 발가락까지 이동했다. 텐트도 잔뜩 얼어 있었다. 텐트가 안밖으로 다 얼어있는 것을 보니, 오늘의 기온은 영하인 모양이다.
아... 춥구나...
이젠 겨울이구나...
그래도 간밤의 미친바람은 멈추었으니 다행이다. 추위와 바람, 둘 중 하나만 멈추어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피재 방향으로 가는 길은 지척에 국도를 끼고 나란히 가는 길이다. 매우 평탄하고 넓은 길이 이어져 걷기에도 좋았다. 걷는 길의 왼쪽 능선으로 오늘의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추웠다. 특히 발가락이 얼 것 처럼 추웠다. 영하의 기온은 평소와 무척이나 달랐다. 발가락이 너무 시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박배낭을 메고 산에서 달리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평탄한 등산로를 마구 마구 달렸다. 임도에 닿을 때 까지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났더니 몸에 온기가 돌며 발가락에도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고 났더니 기분도 제법 괜찮아졌다.
피재, 삼수령에 도착했다. 국도와 만나는 곳이다. 굉장히 좋은 정자가 세워져 있기에 그곳에 앉아 물티슈로 세수를 했다. 아침에 너무 추워서 세수도 못한 것이다.
여기서 국도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대간길 입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 했다. 건너편으로 등산로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보고 나침반을 들여다봐도 감이 안 잡혔다.
국도를 따라 아래쪽으로 5분 넘게 내려갔다가, 다시 국도를 따라 위쪽으로 10분 넘게 올라왔다. 그랬더니 드디어 국도 건너편의 대간길 입구가 보였다.
백두대간 등산로를 따라가는 길은 오른편으로 국도가 내려다보였고, 왼편으로는 개인 소유의 목초지가 있었다. 시작 부분에서 철조망 울타리가 굳건하던 개인 목초지는 위로 올라갈수록 울타리가 허물어진 곳이 많았다. 허물어진 울타리를 넘어 살짝 들어가보면 대관령의 삼양목장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초록풀의 평원이 보여기분이 좋았다.
대간길을 따라 좀 더 위로 올라갔더니, 이번에는 울타리가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설치되지 않은 구간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굉장히 멋진 표지석이 있었는데 '3대강 (한강, 낙동강, 오십천) 의 분수계' 를 알리는 표지석이었다.
한강의 발원지는 곧 지나가게 될 태백의 '검룡소' 라는 곳이다. 그러면 이곳은 검룡소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낙동강과 오십천으로 나뉘어지는 곳이라는 뜻일까? '분수계' 가 하천의 유역을 나누는 경계라고 하니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변은 그저 목초지일 뿐이었다. 근처 어디에도 흐르는 물줄기는 없었다. '3대강 분수계' 가 땅 아래로 흐르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니 '백두대간' 과 '낙동정맥' 이 나뉘는 갈림길도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산맥은 1대간 1정간 13정맥 으로 나뉘는데, 그중 9개의 정맥이 남한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자연스럽게 정맥종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두대간을 모두 종주하고 나면 9정맥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평생 산에 있고 싶었다.
낙동정맥을 따라가고픈 마음을 접고 묵묵히 오르막을 오른다. 언젠가는 저 길을 가볼 기회도 오겠지. 그러니 오늘은 오늘에 주어진 길을 걸어가자.
묵묵히 걷다보니 어느덧 눈 앞에 풍력발전기가 나타났다. 와아아아~!!! 강원도엔 풍력발전기가 도대체 몇 군데나 있는 것일까?
대관령의 삼양목장에서 처음 풍력발전기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의 유일한 풍력발전기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백두대간에서만 세 번이나 발전기를 만났다.
태백의 고랭지 배추밭 언덕 위로 풍력발전기가 나란히 있었고, 백두대간 등산로는 이번에도 발전기 바로 아래를 걷는 길이었다.
고랭지밭 주변을 도는 임도와 산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어느덧 '매봉산' 정상에 도착한다. 별로 '정상' 같지 않은데 정상이다. 매봉산 정상석 근처에는 송전탑이 있었다. 그 쪽으로 뭔가 데크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여서 별 생각없이 송전탑 뒤로 가보았다. 그런데
우오오오오!!!!
태백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시내 뿐만이 아니다. 태백시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능선이 모두 내려다 보였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이 이렇게나 크고 넓게, 이렇게나 선명하고 가깝게 보여지기는 처음이었다. 날씨까지 도와주어 나는 태백의 사방팔방을 부족함없이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시야가 무척이나 깨끗한 날이었다.
아!
이런 곳에서 야영을 했어야 했는데!!!
이런 곳에서 붉어지는 능선을 굽어보고
별도 보고 달도 보고
태백시의 소담한 야경을 감상했어야 했는데!!!
이 천혜의 전망지를 두고 돌아서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송전탑 아래. 그리고 풍력발전기 바로 옆이다. 고압전류와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에 절대로 야영을 해서는 안될 곳이다.
아... 아깝다!
무지하게 아깝다!
아쉬운 마음을 풍력발전기로 달랜다. 오늘은 하늘의 파란색이 무척이나 짙어서 하얀 풍차가 더욱 돋보이는 날이었다. 파아란 하늘 아래의 풍차는 연둣빛 목초지가 아니어도 좋았다. 풍차의 오른쪽 아래는 고랭지 배추밭이고 왼쪽 능선은 앙상한 나무숲이 이어진다.
가족단위나 여자들끼리 우정여행을 와도 좋을 귀엽고 아기자기한 설치물도 있었고, 풍차가 이어지는 언덕배기의 가장 높은 곳에는 네덜란드식 풍차가 있었다. '바람의 언덕' 이라고 씌어진 네덜란드 풍차는 그 안이 소규모 전시공간이었는데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아마도 주말에만 오픈하는 모양이다.
풍차가 있는 곳에서 경사면 아래를 내려다보면 눈에 보이는 곳이 모두 배추밭이다. 배추의 초록빛이 알알이 들어차면 엄청난 장관을 연출할 것 같다.
파아란 하늘 아래 흰색 풍력발전기
그리고 배추잎이 아직 연노랑을 띄고 있을 계절이면
그 너머의 산능선은 모두 초록일테지!
아아~~
상상만으로도 눈이 부시다!
풍력발전기와 배추밭을 모두 지나면 백두대간은 다시 산길 숲길로 이어진다. 등산에 있어 이런 탁 트인 조망지는 필수다. 하루종일 조망지 하나 없는 산길을 걸을 때면 등산이 전혀 즐겁지가 않다.
비단봉을 지나 조금 더 가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배낭을 내렸다. 비단봉에서 금대봉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20분에 한번씩 돌탁자와 돌의자를 놓아둔 공터가 나왔다. 등산로도 매우 넓고 완만한데 이런 휴식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어 걷기에도 좋고 식사를 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바람이 제법 분다. 사방이 나무로 가려진 안부인데도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몸으로 버너를 가려가며 힘들게 밥을 끓여야 했다.
점심을 먹고나서 금대봉으로 향했다. 금대봉까지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한 등산로인데도 의외로 진이 빠졌다. 고랭지 배추밭처럼 금대봉을 향하는 등산로도 계산식인 것인지, 눈 앞의 봉우리를 다 오르면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봉우리를 올라가면 또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났다.
오! 봉우리가 나타났으니 저기가 금대봉인가봐! 했던 마음은 '속았다!' 로 바뀌고, 그렇게 봉우리를 예닐곱번은 올라야 진짜 금대봉 정상이 나타난다.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배신감으로 이어지자 정상을 향하는 걸음이 지치고 짜증났다.
그래도 어쨌든 도착한 금대봉.
여기에서 남쪽으로 꺾어지면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길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가 나타난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5구간
진행 구간 : 피재, 삼수령(강원도 태백)-매봉산-풍력발전기-비단봉-금대봉(강원도 태백)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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