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웨스트엔드의 백인 선호를 깨뜨린 <오페라의 유령>을 보다
"프리마돈나, 세상이 당신 발 밑에 있어요! 온 나라가 당신을 기다리네요. 노래해요, 프리마돈나!"
고백하건대, 나는 뮤지컬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여행하며 봤던 <라이언 킹>, <노트르담 드 파리> 등의 쟁쟁한 뮤지컬을 즐기는 라이트 팬일 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송두리째 뺏은 하나의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동명의 프랑스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이다. 슬픈 운명을 가진 괴신사 "유령"과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의 비극적 사랑을 다뤘다. 1986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되었으니 장장 35년 10개월의 엄청난 역사를 지닌 뮤지컬계의 조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오늘은 그 역사적인 뮤지컬을 현장에서 직접 보게 된 날이다. 35년 전 초연된 이곳,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 줄여서 HMT)"에서 말이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웨스트엔드로 향한다. 피카딜리 서커스 튜브 역에서 내려 5분 쯤 걸었을까. 고색창연한 극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여왕 폐하의 극장(HMT)은 말 그대로 아름답다. 자그마한 규모에 화려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극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무대 위에 매달려 있다. 붉은 커튼과 고풍스러운 장식들은 관객들에게 흡사 19세기 신 바로크 양식의 파리 오페라 극장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뮤지컬로 유명한 런던의 웨스트엔드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유명 뮤지컬들은 1년 365일 공연하는 각각의 전용 극장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뮤지컬계의 조상님"인 오페라의 유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런던과 뉴욕의 가장 목 좋은 곳에 떡하니 전용 극장이 자리 잡고 뮤지컬 팬들을 유혹하고 있다.
오페라의 유령의 주역은 어둠 속에 가려진 수수께끼의 신사, 유령과 그의 뮤즈인 신예 가수 크리스틴이다. 19세기의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을 무대로 써졌기에, 하나의 불문율처럼 백인 배우들을 기용해왔다. 그런 오페라의 유령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유령에 캐스팅된 최초의 동양인과 흑인 크리스틴
본고장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본 두 번의 오페라의 유령.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비 백인 크리스틴을 보게 되었다. 쌀쌀한 뉴욕의 봄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본 "오페라의 유령" 역사 상 최초의 동양인 크리스틴을 기억한다. 필리핀 계 어머니와 유럽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뮤지컬 배우 앨리 애월트(Ali Ewoldt)다. 살짝은 이국적이고 친숙한 동양인의 외모로 청초한 크리스틴을 소화해내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오늘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검은 곱슬머리에 함박웃음이 매력적인 또 한 명의 크리스틴은 영국의 흑인 뮤지컬 배우인 루시 센 루이스(Lucy St.Louis)이다.
"바로 그가 여기에 있어, 오페라의 유령..."
살인적인 높은 고음에서도 단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고운 목소리를 유지하며 관객들을 마법에 빠뜨린다. 디즈니 영화인 "미녀와 야수"에서 연회장에서 춤을 추며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 데뷔탕트로 분하기도 했다. 그녀 두 명 모두 유색인종 최초로 크리스틴 다에를 연기한 타이틀에 빛나는 훌륭한 배우들이다.
늘 백인만을 선호하던 뮤지컬에 당당히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웨스트엔드의 혁신적인 변화의 물결. 나날이 늘어나는 이민자들과 공존과 화합의 담론.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인종 간의 갈등 굴레를, 영국의 전통적 강점 중 하나인 거대한 문화 권력을 이용한 "소프트 파워"로 지혜롭게 통합하려는 시도가 주목할 만하다. 오늘 들었던 역사상 최초의 흑인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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