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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young Choi Aug 29. 2022

노팅힐에선 미남 배우를 찾지 마세요

앤티크의 천국, 노팅힐 포토벨로 마켓 탐험기

영국의 대표 미남 배우, 휴 그랜트가 살던 "노팅힐" 영화 속의 파란 대문을 기억하는지? 영화 팬이라면 지금의 초라한 모습에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1999년 까마득한 시절에 개봉한 노팅힐은, 런던 노팅힐 지역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소심한 영국 남자 휴 그랜트와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배우인 미국 여자 줄리아 로버츠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엘비스 코스텔로가 소울 충만한 목소리로 부르던 주제가 "She"로도 친숙한 바로 그 영화다.


런던의 상징 2층 버스(더블 데커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에 몸을 싣고 20분 남짓 달렸을까. 눈부신 파란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의 빅토리아 양식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팅힐이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평일에도 북적이는 노팅힐 포토벨로 마켓의 전경이 펼쳐진다. 과연 런던에서 손꼽히는 앤티크 시장이다. 살짝 좁은 듯한 골목길에 펼쳐진 천막들 옆으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길거리에 잔뜩 가져다 놓은 화사한 꽃 좌판에 눈길이 간다. 소담스레 핀 연분홍 장미 여섯 송이에 3 파운드, 바다 라벤더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보랏빛 꽃은 세 줄기에 7파운드에 팔고 있다. 노란 박스에 담겨 손님들을 옹기종기 기다리는 꽃들이 몹시 앙증맞다.


영국인들의 꽃 사랑은 대단하다. 대단한 일이 없어도 일상생활에서 종종 꽃다발을 한가득 안겨주곤 한다. 소중한 사람이 병원에 다녀왔건, 이웃집에 초대를 받았건, 새로 이사를 왔든 간에. 꽃을 줄 이유는 넘치고 넘친다. 그리고 꽃다발을 안고 총총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행복하다.


오래된 레코드 노점에서 비틀즈 초판을 발견하다


오래된 바이닐(흔히들 LP판이라고들 한다)을 파는 좌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익숙한 브릿 락에 제일 먼저 손을 뻗어본다. 애비 로드를 건너는 앨범 커버로 유명한 동명 비틀즈의 앨범 초판이 350파운드란다. 들고 있는 손이 절로 떨리는 가격이다. 새삼스레 락의 본고장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골목 사이 숨겨진 레코드 가게들도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보물 같은 존재들이다.


전세계 음식들이 한 자리에 모인 그 곳, 포토벨로 마켓


어디선가 튀기고 볶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온다. 음식 냄새를 쫓아온 고가도로 밑 한편에선 노랗고 빨간,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천막 밑에서 온 세계 음식의 각축장이 벌어지고 있다. 아랍 요리 팔라펠, 태국식 볶음 국수, 베네수엘라 전통 옥수수빵인 아레파(Arepa) 같은 음식들이 솜씨 좋은 각국 출신의 요리사들 손에서 익어 가는 현장이다. 빨갛게 양념된 감칠맛나는 고구마튀김을 한 쪽에 곁들여, 걸쭉한 블랙 빈, 고기 등을 햄버거처럼 끼워 먹는 베네수엘라 스타일 아레파는 그 토속적인 맛과 모양새가 매력적이다.


먹을 것 없다고 오해 받는 영국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에 가득한 이민자들 덕분에 전 세계의 음식을 최고급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런던이라고 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여행자 입장에선, 소박한 길거리 노점에서도 썩 괜찮은 가격에 전 세계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곳도 런던이다.


빈티지 책들과 찻잔에 빠지다


푸드 마켓 바로 옆은 중고책 가판대가 즐비하다. 파란 재킷을 입은 오동통한 영국 토끼, 피터 래빗을 위시해 예쁘장한 빈티지 일러스트가 그려진 어린이용 동화책에 눈이 간다.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좋아하는 천진한 곰 패딩턴의 책들도 시리즈별로 나와 있다. 콤콤한 옛 책 냄새와 페이지를 넘길수록 느껴지는 주인의 손때가 정겹다.


포토벨로 마켓의 끝자락에선 진짜 골동품 시장이 펼쳐진다. 할머니의 서랍장을 뒤져 들고 나온 것 같은 각종 빛바랜 장신구와 오래된 동전들, 먼지가 뽀얗게 쌓이긴 했어도 백조 같은 우아함을 뽐내고 있는 앤티크 찻잔들이 가판 위에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연한 핑크빛의 레이스가 새겨진 청초한 빈티지 도자기 찻잔 한 조를 골똘히 들여다본다. 찻잔, 소서, 플레이트 1인 구성에 15파운드라는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선물 받아 집에 고이 모셔둔 고운 민트색의 찻잔이 떠올랐다. 이미 다 갖추고 있잖아, 라는 생각에 물욕을 버리기로 한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안녕, 노팅힐의 예쁜 찻잔아.


중고책과 서점, 빈티지 찻잔과 옷들, 바이닐이 즐비한 노팅힐의 포토벨로 마켓.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천국 같은 곳이다. 보는 눈만 있다면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중고 물건들을 건질  있어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파란  앞에서 활짝 미소 짓고 있는  그랜트는 없어도, 영국의 낭만적인  감성에 흠뻑 젖을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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