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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Nov 15. 2021

남자는 핑크지!란 말에 담긴 임산부의 진짜 마음

임산부가 되고 나서 처음 받은 선물은 범보 의자였다. 의자 다리가 없이 아기의 등, 엉덩이와 허벅지를 받칠 수 있는 낮은 의자인데 보통 아기가 백일쯤 되면 앉기 시작한다고 한다. 남편은 친구가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보낸 상품의 링크를 나에게 보내며 옵션을 선택하라고 했다. 의자의 색상, 그리고 아기 등받이로 함께 나오는 토끼 모양 쿠션의 패턴을 고를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임신 14주였고, 성별을 확인하기 전이었으므로, 고심 끝에 무난하게 그레이 색상 의자에 흑백의 도트 패턴 쿠션을 선택했다.


만약 딸이었으면, 분홍 색상을 선택했을까?


산부인과 정기 진료는 17주 차에 있었고, 그날 나는 뱃속 아기가 아들임을 확인했다.


그즈음에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아기 옷 몇 벌을 물려주었는데, 그중에는 아주 상큼한 분홍색의 멜빵바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자인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는 함박웃음 지으며 말했다. 역시, 남자는 핑크지! 우리 아기한테 입혀볼 날이 너무 기대돼! 그런데 그 이후로, 다른 친구들에게도 새 옷을 선물 받거나 헌 옷을 여러 벌 물려받았는데 더 이상 분홍색 옷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아기 옷을 한 벌 한 벌 빨고, 건조하고, 개면서 그 작고 앙증맞음에 더없이 감격했지만, SNS를 하다가 내가 살 수 없는 꽃무늬 원피스나 리본 머리띠를 보게 되면 아주 조금 아쉬워했음을 고백한다.


아들이든 딸이든 성별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요새 여자 아기의 옷들은 너무도 예쁘게 나온단 말이다!


*


이런 마음, 자연스러운 건가?


나는 내가 다를 줄 알았다. 여자는 핑크, 남자는 블루; 여자는 인형 놀이, 남자는 축구, 이런 공식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일 줄 알았다. 아니, 어릴 때부터 이렇게 아이들을 성별로 구분 짓는 거 경계했고, 싫어했다.




여자는 꼭 긴생머리에 치마를 입어야 '여자답다'는 낡은 생각도, 반대로 여자는 숏컷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어야만 멋진 거라는 요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 해야 한다'가 아니라 '~~ 하지 않으면 안 된다'를 거절했을 뿐이다. 여자는 밖에 나갈 때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는 늘 관리를 빡세게 해서 날씬한 몸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거부했다. 여자든 남자든 본인이 원하는 거 입고 살고 싶은 모습으로 살면 된다. 그리고 남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니든 평가하지 말자, 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긴 머리에 원피스를 즐겨 입었고 남편은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으며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달라진 건 딱 하나, 아기가 찾아왔다는 것. 언제부턴가 나는 내 아이가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상을 이분화해서 보기 시작했다.


우선 옷들. 꽃무늬, 레이스, 리본 달린 옷들에게 모두 작별 인사를 보냈다. 아기의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고 커플 원피스를 입는 상상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머리쯤은 조금 길러 똑딱 핀을 꼽아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아기가 걷고 뛰고 말도 어느 정도 하게 되면 남편이 좋아하는 삼성 라이언즈 야구 유니폼을 맞춰서 가족이 함께 야구장에 놀러 가야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려면 축구를 잘해야 한다고 하니 어릴 때 축구 클래스를 보낼 생각도 있다. 제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격투기도 하나쯤 가르치고 싶다. 이런저런 상상들 중에 인형 옷을 갈아 입히는 장면은 없다. 내가 어릴 적 꽤나 좋아했던 놀이였는데.


나는 고리타분한 엄마이고 싶지 않다. 아들의 "남성성"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아기가 슬플 때 '너는 남자니까 울면 안 돼'라며 감정을 억제시키고 싶지 않고, '너는 남자니까 엄마를 지켜줘야 해'라며 어린아이에게 부담감을 지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나는 성별 따위는 개나 주라는 생각으로 아들에게 꽃무늬 원피스를 입힐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아이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무탈하고도 '평범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키울 것이며, 동시에 아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그의 타고난 천성을 살려주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친구가 딸이 쓰던 유모차와 카시트를 물려줬다. 둘 다 쨍한 분홍색이다. 카시트는 차 안에서 그냥 쓰면 되는데, 유모차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친구는 카톡으로, 유모차 커버는 따로 구입해서 쓰라고 알려줬다. 과연 검색해보니 커버(캐노피) 만도 따로 판매하고 있다. 가격이 18만 원이나 할 뿐... 만약 새 유모차를 사야 하는 입장이었으면, 나는 깔끔한 회색 커버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려받은 것, 18만 원이나 주고 굳이 커버를 바꿀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분홍색 유모차에 아들을 태우고 아파트 단지와 주변 공원을 산책하러 나갈 수 있을까? 마음속에서는 "왜 안돼 - 뭐 어때" 하는 목소리와 "그래도 첫 아이인데, 내가 더 마음이 끌리는 색상으로 하나 사면 또 어때서" 하는 목소리가 부지런히 싸우고 있다. 남자는 핑크라며 호탕하게 웃음 지을 때는 언제고, 엄마의 마음은 모순으로 드글드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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