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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Feb 26. 2020

재택근무를 하면 안 되는 이유

최대한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회사가 재택근무 전면 적용을 아직 하지 않고 있다.
그래,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거야.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회사 인사팀은 어제 재택근무를 부분적으로 허용한다는 가이드를 게시판에 올렸다. 특정 지역을 방문했거나 의심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 혹은 어린이집/초등학교 개학 연기로 인해 집에서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경우에 별도로 직속 팀장과 인사 담당자와 협의하여 재택근무를 신청할 수 있다.


60명이 가까이 되는 부서에 한 명의 재택근무자가 나왔다. 열이 38.1도에 목이 부었기 때문이다. 직원 대부분이 부모이고 절반이 엄마인데, 아이를 돌보기 위한 재택근무 신청자는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부서만 그런가 했더니 다른 부서들도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회사가 크기 때문에 재택근무가 조금 더 자유롭게 허용되는 부서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모두 눈치싸움 중이다. 아직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먼저 용기 내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엄마들은 하루 이틀 씩 개인 연차를 사용하고 있다.


뉴스에서는 다른 기업들이 하나둘씩 재택근무를 시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우리 회사는 왜 이렇게 잠잠할까. 나를 포함한 직원들은 오늘도 인사팀을 탓하며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인사팀 출신이다. 인사 업무를 2년 경험하고 나서 지금 사업팀으로 옮긴 지 이제 8년이 되었지만, 그래도 직원들이 회사의 인사 제도나 복지 혜택 대해 인사팀을 탓할 때마다 항상 속으로 '인사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는 한다. 게다가 나는 파트장도 팀장도 아닌 일개 과장일 뿐이니까, 어쩌면 회사 사업의 운영을 걱정하는 '리더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사팀의 입장에서, 리더의 입장에서 보면 일개 직원의 생각이 미처 닿지 못하는 다른 여러 고려 사항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하루 나는 최대한 '인사팀의 입장'과 '리더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을 선뜻 재택근무 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1. 재택근무 시키면 업무 진행이 어려울 것이다.

- 우리 회사가 클라우드 PC를 도입한 지 3년이 넘었다. 굳이 회사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노트북 컴퓨터만 있으면 모든 파일에 접속할 수 있다. 집에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직원은... 아마도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노트북을 열어 엑셀도 사용할 수 있고 피피티도 만들 수 있고 당연히 메일도 읽고 답할 수 있다.


아 그런데 해외 업무를 하는 직원들은 국제 통화할 때 집에서 하기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 직원들의 국제 통화비를 아껴주기 위해서 재택근무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걸까?


2. 재택근무 시키면 회의 진행이 불편할 것이다.

- 우리 회사가 클라우드PC만 도입했을까. 사내 메신저는 내가 입사했던 2010년부터 있었다. (아마 그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모든 직원들과 메신저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스크린셰어 프로그램도 있다. 같이 회의에 참여한 직원들과 화면을 자유자재로 공유할 수 있고, 제어권을 넘겨주는 것도 가능하다.


이번 주부터 우리 회사는 코로나 19 비상사태에 돌입해 사업장 간의 외근은커녕 같은 사업장 내에서도 최대한 회의실로 이동하지 않고 자리에서 conference call로 모든 회의를 진행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 팀원들끼리 열렬하게 토론할 필요가 있을 때 동료 직원들이 시끄러워할까 봐 회의실로 이동하긴 하지만, 그 외의 모든 회의는 자리에서 진행한다. 그렇게 모든 걸 원격으로 할 거면 근데 집에서 하면 안 되는 걸까?


3. 재택근무 시키면 보고와 의사 결정 과정이 불편할 것이다.

- 음, 이 가설은 가장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이게 원인일 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중요한 문제를 보고하고 의사 결정하는 데 있어 대면 보고는 서면 보고보다 편리하다. 업무를 진행하다가 임원 보고가 필요한 건이 있을 때, 팀장님은 사소한 일이라 판단되면 서면 보고로 진행하라고 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반드시 대면 보고 일정을 잡으라고 지시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사안을 설명하고 의사결정자의 질문에 즉각 대답하는 일은 메일을 통한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런데 얼마나 더 강력한가. 요즘처럼 모두 조심해야 하는 시기에 재택근무를 허용할 수 없을 만큼 대면보고가 서면보고 보다 더 강력한가? 그만큼 사업의 사활이 걸려 있어 대면 보고로만 진행해야 하는 보고가 매일매일 있는가?


4. 재택근무 시키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할 것이다.

이건 나도 부정 못하겠다. 수많은 임직원 중에는 재택근무를 시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 재택근무를 시켜놨더니 일은 안 하고 집에서 잠만 자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건 다 티가 나는 법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고, 매일 메일이 오가고 회의가 진행이 된다면, 누가 일을 하지 않고 누가 집에서도 성과를 냈는지 다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혹시 업무 시간 중에 정말로 할 일이 없는 시간이 생긴다면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유관 부서 / 파트너 회사 등에 보낸 후에, 대기하는 시간) 회사에서 동료들과 차 한 잔 하며 쉬거나 집에서 잠깐 딴 짓을 하거나가 크게 다를까?





오늘 우리 팀원들은 자리에서 여러 번 코로나 관련 뉴스를 공유했고, 불안함을 토로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재택근무를 한 직원과는 업무로 엮인 일이 있어 몇 번 메신저로 말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5초 안에 답변이 왔다. 정상 출근자와 재택근무자는 모두 별 탈 없이 근무를 했다.


사실 아무리 역지 사지를 해보려고 노력해도 나는 리더도 아니고 인사팀도 아니고 일개 직원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왜 우리 회사가 단 몇 주라도 재택근무를 시행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이후에 잠잠해지고 나면, 재택근무를 전면 허용한 회사들은 시행착오의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단 2주 동안 시행하는 동안 편리했던 점, 생각지 못했던 단점, 시스템 적으로 개선할 점들이 전 직원의 목소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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