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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Jun 16. 2020

이천팔백원의 사치, 연필의 취향

블랙윙602과 연남동 흑심에 대한 기록


내 인생의 첫 번째 명품 연필 블랙윙 Blackwing


내가 팔로미노Palomino 사의 블랙윙 연필을 처음 구매한 건 2018년이다. 한 자루에 무려 2,800원이나 하는 연필이었다. 한 다스도 아니고.

한 자루가 2,800원이라니. 겨우 연필 한 자루가 이렇게 비쌀 수도 있는 건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콩알 같은 심장으로 블랙윙 연필 두 자루를 샀다. 하얀색 바디의 블랙윙 펄과 회색 바디의 블랙윙 602이였다.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이 글을 쓸 때 블랙윙 602만 고집했다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얻고는 와 이런 역사적인 연필을 이제 나도 쓸 수 있는 거냐며 감개무량했다.


집에 와서 식탁 위에 이면지를 깔고 자세를 잡았다. 연필의 삼나무를 한 겹 한 겹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연필을 깎아본 게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반듯하던 연필이 점점 울퉁불퉁하고 못생겨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슥슥슥슥 소리가 나며 나무가 깎이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블랙윙 602 한 자루를 먼저 마무리하고 블랙윙 펄의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편이 나섰다. 연필깎이는 자신이 전문가라로 굳이 직접 시범을 보이겠다고 했다. 내가 직접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옆에서 괜히 솜씨 뽐내고 싶어 벌써부터 신나 하는 남편이 귀여워 작업을 양보했더니,

  오오 그는 정말이지 연필깎이의 전문가가 맞았다.


남편이 깎아준 블랙윙 펄(위)와 블랙윙 602(아래)


내가 할 때는 뭔가 나무를 토막토막 조각내는 느낌이었다면, 남편이 하니 능숙한 솜씨로 사과 껍질을 깎는 (peel)의 느낌이었는데, 샤샤샤샥 소리는 거의 ASMR급이었다. 시켜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연필 두 자루가 깎여나가는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감상했다. (그는 내가 이미 깎아놓은 블랙윙 602도 처음부터 다시 깎았다.) 시부모님 두 분 다 미술 전공이셨어서 남편 자신도 연필 깎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서양미술 전공인데 나는 왜... 라는 생각은 혼자만 했다.)


블랙윙 연필은 합정이나 광화문 교보에서 쉽게 구매할 수가 있어, 그 후로도 계속 사용해왔다.




알고 보니 블랙윙은 내 '연필 취향' 정반대에 있었고


나의 연필 구매사의 종지부를 찍은 건 연남동의 흑심(Blackheart)라는 조그마한 연필 가게이다. "오래된 연필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수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내세우며 다양한 빈티지 연필을 모아둔 공간이다. 처음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삼 십분 가까이 그곳에 머물며 가게 안의 모든 연필을 시필해보았다.



사실 블랙윙 연필에 대한 나의 애정은 그 '이름값'에 한몫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연필 하나만은 정말 좋은 걸 쓰고 있다는 기분이 좋았다. 실제로 필기감이 여느 연필보다 부드럽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기분 탓이었을 것 같다. (만약 연필 Blind Test라는 게 있다면 나는 내가 2년 가까이 써온 블랙윙602 연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이소 한 다스 1000원 연필을 선택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로지 연필만을 취급하는 이 가게에서 나는 이름값도 가격도 모두 무시한 채로 오로지 필기감에만 집중했다. 와인도 많이 마셔본 사람들만 이게 드라이한 건지, 오크 향이 나는 건지 베리나 배 향이 들어간 건지 알아챌 수 있듯, 연필도 다양하게 써보지 않았던 나는 뭐가 '좋은' 건지는 하나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척 신기하게도, 한 자루 한 자루의 필기감이 제각각 모두 달랐다. 당연히 더 진하고 더 연한 것이 있었고 (HB, B, F,  등등등의 진하기가 구분되어 있듯이), 같은 진하기 등급 안에서도 색이 오묘하게 달랐으며 (더 은색에 가깝거나 더 검은색에 가깝거나), 종이에 닿았을 때의 마찰감도 모두 달랐다.



연필 경도는 주로 HB, B와 같이 영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숫자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숫자가 커질수록 단단하고 연해지는 데, 보통 아래와 같은 진하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No.1=B
No.2=HB
No.2.5=F
No.3=H
No.4=2H

(출처 : 흑심 인스타그램 @blackheart_pencil)


오십 자루도 넘는 연필을 써보았을 때, 나는 나의 연필 취향이 HB와 H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주야장천 써왔던 블랙윙 602는 2B인데!) 나는 꼭 부드럽지는 않아도, 종이에 쓸 때 마찰이 느껴지는 서걱서걱한 느낌이 좋았다. 그 단단한 존재감은 나를 계속 쓰고 싶게 만들었다. 첫 방문 이후 나는 네 번인가 더 흑심을 방문하였고, 매번 No.2(HB), 혹은 No.3(H)의 경도의 연필을 구매해 돌아왔다.


(흑심에선, 구매할 연필을 모두 골라 카운터에 가면 결제를 하는 과정에서 해당 연필의 역사와 이야기를 구매자에게 상세히 들려준다. 나처럼 '이름값'이나 '희귀성' 같은 실체 없는 것에 취해 연필을 고르는 사람을 위한 배려일까. 여러 번 충분히 시필을 해 본 후, 가장 나의 마음에 드는 연필을 고르면 그제서야 연필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어 주는 것이다.)


흑심의 연필은 방문할 때마다 line up이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2천원에서 8천원 사이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얼마 전 나는 이곳에서 기어코 만 원이 넘는 속기용 연필을 한 자루 구매하고 돌아왔다. Vintage National Pencil Co. Quote 56 No.2 Made in USA 인데, '작게 써도 뭉게지지 않도록 연필심이 단단하고, 빨리 쓸 수 있도록 부드러운 필감을 가지고 있는' 연필이다.


최근 두 달 새 흑심에서 구매해온 연필들. 그리고 블랙윙602




그러고 보니, 2년 전만 해도 무슨 연필이 한 자루에 2,800원이냐고 했던 적도 있던 내가 이젠 만 원도 넘는 연필을 망설임 없이 샀네. 오래된 건 아니지만, 그 사이 그만큼 연필이 더 좋아진 것 같다. 커피 한 잔값, 밥 한 끼 생각하면 정말 만 원으로 마음껏 사치하고 오래동안 쓸 수 있는 물건은 연필만한 게 또 없는 것 같다.



참고로 나의 취향에 맞는 HB와 2H 연필들 사이에서 지금도 블랙윙 연필은 무척 잘 쓰이고 있다. 예외를 두어도 괜찮을, 이미 내 손에 익숙해진, 나의 첫 사랑이니까.


연필은 주로 이런 데 쓴다. 책에 밑줄을 치거나, '이 부분 이해 안됨' 이라고 메모해둘 때.


    

(+얼마 전에 합정 교보문고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블랙윙602의 가격이 3,000원이었다. 인터넷은 조금 더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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