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의 Jun 23. 2020

남편은 서울대를 가고 나는 내 갈 길을 가고

ESTJ 남편과 INFP 아내의 직장 생활 극과 극

내가 대학원을 꿈꾸기 시작한 건 직장 3년 차 즈음부터였으니까 이제 7년도 더 넘었다.


평범한 대기업에서 사무직 제너럴리스트로의 업무가 권태로워지기 시작했을 때, 학부 때는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도 않은 대학원의 길이 처음으로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대학원의 그림은 친구들이 많이 선택하는 유명 MBA에 입학하는 길도, 석사와 박사를 거쳐 교수가 되는 길도 아니었다. 매일 출퇴근이 지겨워질 때마다 나는, 프랑스나 헝가리(같은 곳)의 이름도 생소한 시골 도시에 있는 캠퍼스에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고 도서관에서 근현대 서양철학이나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을 뿐이었다.


막상 현실로 실행하라고 하면 나부터 겁먹을 것 같은 <달과 6펜스>적인 로망을 가슴 한 구석에 간직한 채 나는 매일 출근을 하고 또 퇴근을 했다. 때로는 국내 통번역대학원이나 빅데이터, 방송미디어처럼 조금 더 업무에 가까운 방향으로 구체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석사의 꿈은 나에게 작은 로망의 크기로만 머물렀다. 꽤 오래 아기를 기다리고 있고, 당장 다음 달이라도 임신을 되길 기대하고 내년에는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싶은 나에게는 집 앞 10분 거리의 국내 대학원이나 프랑스 시골 마을의 대학원이나 마찬가지로 다른 평행 우주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다 하루, 공부에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 남편이 퇴근하며 A4용지 몇 장을 인쇄해왔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서울대 MBA 프로그램의 안내문이었다. 사내에서 딱 한 명만을 뽑아 학비를 전액 지원해준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업무 시간 중에 남편이 카톡을 보내왔다.


그 '단 한 명'에 남편이 최종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남편과 나는 무서울 정도로 서로 성향이 다르다. 연애 기간이 1년이라 겨우 결혼했지 더 길어졌더라면 분명 크게 싸우고 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서로 좋은데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르지 했는데 얼마 전 남편이 처음으로 MBTI 검사를 하고 나서야 드디어 증명?이 되었다. (사실은 남편이 이런 거 관심 없다고 귀찮다고 안 하겠다고 하는 걸 내가 겨우겨우 구슬려서 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우리는 상극이었다. 나는 INFP, 남편은 ESTJ.


MBTI 궁합에 따르면 INFP와 ESTJ의 궁합은 '지구 멸망의 길'이라고...



회사와 일, 커리어와 꿈, 취미에 있어서 우리는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INFP 아내 :

- 10년 동안 직무를 세 번 변경하여 서비스 기획을 시작했다. 서비스 기획 일을 나름 즐겁게 하고 있으면서도 늘 '이 일이 과연 나에게 맞는 걸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 한 구석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이 일이 내 천직만 같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이 업무가 나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 사회생활에 서툴고 회식만 다녀오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는 기분이지만 팀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싶지는 않다. 필수 참여가 아닌 회식은 가능한 빠지려고 노력한다.


- 업무로 욕먹고 싶지 않으며 회사 안에서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그러나 워크앤 라이프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퇴근 후의 취미 생활이 회사 생활보다 내게는 더 가치 있다.


-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는 이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욕심을 좀 버리든가, 아니면 아예 좀 더 이 악물고 일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 업무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쪽으로 알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아 신이 나고 괴롭다. 부동산 정책이나 재테크 상식 같은 건 하나도 모르면서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철학사, 음악사나 현대미술 같은 건 늘 왜 그렇게 궁금한 건지. 700쪽이 넘는 <우주의 구조 - 브라이언 그린>이나 <생각에 관한 생각 - 대니얼 카너먼>, <혐오와 수치심 - 마사 너스바움> 같은 벽돌책들을 붙들고 몇 달 동안 혼자 괴로워하다가 (정말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기어이 다 읽어낸 후 혼자 기뻐한다.


- 나는 나를 계속 탐구한다. 업무를 하다가 가장 성취감 있던 순간, 야근을 했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일기장에 따로 기록해둔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이게 장점이야'라고 말해주면 그런 것도 빠짐없이 기록해둔다.


- 나는 이 곳에 있으면서 늘 다른 곳을 꿈꾼다.



ESTJ 남편 :

- 뭘 시켜도 책임감 있게 잘한다. '나에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일단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잘 해내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에는 '회사 안에서 커리어를 잘 쌓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내에서 가장 인정받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 주어진 일을 욕심만큼 해내기엔 주 52시간의 근무시간도 부족하다. (반면 나는 현 정부의 주 52시간 근무시간제한을 반대하는 '근로자'가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아니 사장도 아니고... 나는 주 40시간도 채우기 힘들던데...)


- 나와 마찬가지로 회식을 싫어하면서 모든 회식에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누구보다 게으른 사람이지만 회사가 주는 월급 받고 일하는 이상 무조건 워크가 라이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의다.


- 책은 일 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회사일과 상관없는 쪽의 자기 계발에도 관심이 없고 외국어를 공부할 생각도 없다.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오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머리를 쓰지 않는 활동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미드나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을 정주행 하는 것 같은. 덕분에 주말에 우리 집에는 하루 종일 티비가 켜져 있다.


- 회사에서는 늘 S나 A등급만 받고, 발탁 진급을 했다.


- 늘 이 곳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늘 대학원을 꿈꿔왔던 건 나였는데 말이다. 생각지도 않던 남편이 먼저 가게 되었다. 심지어 회사의 지원까지 팍팍 받아서.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부럽지가 않다. 오로지 기쁜 마음뿐이다. 아니 나처럼 속 좁고 질투 많은 사람이 왜 부럽다는 생각이 안 들지? 나는 대범함과도 쿨함과도 거리가 참 먼 사람인데. 나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내 안의 '선한(?)' 감정에 나는 의아했다. 내가 그만큼 순수하게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였던 건가. 아니면, 이런 게 바로 가족愛 (혹은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로서의 동료愛)라는 건가?


혼자 또 실컷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MBTI 유형만큼이나 남편은 나와 정반대로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남편 인생은 남편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구분해올 수 있었던 거였다. 오히려 우리에게 비슷한 구석이 더 많았다면 그동안 조금씩 나와 내 남편을 비교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사 안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남편을 보면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는 내가 무척 초라하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5년 동안 단 한 번도 남편과 나를 비교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듬직하게 회사 안에서도 대학원에 가서도 잘 해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양자 역학과 은하계 너머와 환경 문제와 시의 효용과 클래식 음악 감상하는 법 등을 궁금해하며 회사를 다닐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직업을 찾은 이후에도 나는 또 새로운 질문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주하지 않고 헤매는 삶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한 지붕 아래 전혀 다른 모양과 크기의 삶이 두 개나 있으니 우리 집은 앞으로도 꽤 재미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천팔백원의 사치, 연필의 취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