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P가 직장 생활에 가장 부적합한 유형이라고요?
만약 당신이 대기업의 팀장이라면, 다음 중 어떤 직원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
- 직원 A. 활동적이며 행정적인 일과 장기 계획을 선호하며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며 계획하고 조직하고 체계적으로 목적 달성을 추진시키는 지도자들이 많다.
- 직원 B. 조용하고 신중하며, 앞에 나서기보다 관망하고 파악한 후에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업무 할 때도 즉각적인 전화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비대면적인 이메일을 선호한다.
- 직원 C.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고 계획한 대로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일정을 챙기고 시간이나 납기 어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추진력 하나는 누구보다 강하다.
- 직원 D. 동정심과 동료애가 많으며 친절하고 재치 있고 인화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민첩하고 참을성이 많고 성실하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본다
☞직원 A : ENTJ, 직원 B : INFP, 직원 C : ESTJ, 직원 D : ISFP
물론 위의 사례는, 유명한 성격 유형 검사인 MBTI 중 네 가지 유형에 대한 긴 해석 중에서 일부만을 선택하여 가져온 결과일 뿐이다. 각 유형 별로 강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꼼꼼하게 세부 사항을 잘 챙기는 사람들은 가끔씩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답답하게 하기도 하고,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오는 사람들은 종종 현실성이 떨어지는 의견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기에 MBTI의 결과 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좋고 나쁨 / 우월함과 열등감의 구분 없이 서로 다른 '성향'과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MBTI 유형과 회사 내 업무 능력은 무관할까? 과연 외향적인 'E' 성향이 내향적인 'I' 성향보다 파트너 제휴 업무에 더욱 적합할까? 꼼꼼하고 디테일을 신경 쓰는 성향이 그렇지 않은 성향보다 과연 일처리도 그만큼 똑 부러지게 잘할까? 계획적인 'J' 성향이 유연한 'P' 성향보다 항상 마감을 더 잘 지킬까?
(본 글에서 MBTI 성격 유형검사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MBTI 검사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하기의 링크에서 직접 결과를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가끔씩 팀빌딩 활동으로 MBTI 검사를 시행한다. 그렇다고 인사팀에서 강제로 직원들에게 검사를 하라고 시키는 건 아니고, 회사 내 프로그램이 세팅되어 있어 원하는 팀이 자발적으로 신청하면 된다. 나는 10년 동안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 세 번 정도 매번 다른 팀에서 이 검사를 받았다. 코로나19로 웬만한 오프라인 교육들이 캔슬되고 온라인 프로그램들이 활성화되며 다시 한번 회사에서 팀 별 온라인 MBTI 검사 안내 메일이 왔고, 우리 팀은 무척 신나 하며 검사를 신청했다. 대부분의 팀원들이 이 검사를 처음 받아본다고 했다.
나는 MBTI 검사를 무척 재미있어 하지만, 동시에 싫어한다. 나 혼자 결과를 읽는 것도 재미있고 남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한데 내 결과를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직장 생활에 가장 부적합한 성격이라고 알려진 유형이다. 나는 INFP다.
INFP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예술가 혹은 종교인이다. 소설가, 작곡가, 배우, 아티스트 혹은 전도사와 같이 유연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는 일에 잘 맞는다고 한다. 어쩌나. 나는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재택근무도 시켜주지 않는 회사에서 9-6로 출근하는 사무직 직장인인데.
INFP의 특징에는 대표적으로 이런 것들이 있다. 1) 무언가를 시작할 땐 열정적으로, 그러나 마무리는 흐지부지하게. 2) 평소에 별별 잡생각, 망상을 많이 한다. 3) 남 눈치를 많이 본다. 남에게 상처 주는 걸 싫어해서. 4) 좋은 아이디어는 많이 떠올리지만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5) 겉으로는 수줍어 보이지만 막상 관심받으면 기분이 좋다 6) 벼락치기가 일상이고 계획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약하다. 6) 혼자 있는 시간이 좋긴 하지만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은 싫다.
이런 유형 해설들을 읽다 보면 괜히 반항심이 일어난다. 겨우 이런 검사 하나를 가지고 함부로 나를 정의할 수 있다고? 내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하고 알기 어려운 사람인데. 35년을 나로서 살아온 나조차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는데, MBTI가 뭐라고 나를 몇 문단으로 단정해?라고 큰 소리 땅땅 치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그럴 수가 없다. 분하고 짜증나지만 위의 특징들은 나의 이야기가 맞다. 뼈를 때리는 듯 구구절절하게 나라는 인간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민간인 사찰이라도 당한 건가. 누군가 나의 성격을 그대로 본떠서 INFP 해설을 작성한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이런 설명들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다. INFP의 특징인 "시작은 거창하게 그러나 마무리는 흐지부지하게"라든가, "완벽에 가까운 퀄리티를 추구하느라 종종 마감을 넘긴다"라는 유형으로 회사 사람들이 나의 업무 능력을 단정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MBTI 같은 검사에 가장 관심 있어하는 유형도 INFP라고 하던데, 나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자발적으로 대학교 심리센터를 찾아가 MBTI 검사를 받아보았던 사람으로서 나의 약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어떻게든 나도 월급 받아먹는 사람으로서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후천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에, INFP 유형에 흔히 가질 수 있는 선입견에 반박해 보고자 한다.
- 나의 경우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에너지가 무척 한정적이기에, 딱 업무적으로 필요한 말만 효율적으로 하려고 한다. 자발적인 팀 술자리는 절대 참석하지 않고 팀 회식도 싫어하며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 리액션할 생각도 없지만 회사 업무에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은 그런대로 즐거워하는 편이다. 회의를 진행한다고 하면 미리 Agenda를 정해 놓고, 논의해야 할 포인트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들으며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하고 있는 서비스 기획을 하기 전에는 사업 개발 (Business development) 직무를 5년 간 했는데, 해외 파트너사들과 일하는 것도 무척 즐거웠다. 그 일은 80%의 이메일 교환과 15%의 전화 통화로 이루어졌고, 5%는 1년에 한두 번 가는 출장을 통한 대면 미팅으로 진행되었지만 피곤한 술자리 대신 가벼운 점심 식사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 고백하자면 한 평생 벼락치기로 버텨온 인생이었다. 고등학교 때든 대학교 때든 늘 시험에 임박하여 카페인과 타우린에 의존하며 밤샘 공부를 일삼았다. 그렇지만 시험은 늘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강의실에 앉아서 같이 봤다. 나는 시간 개념 없는 사람을 싫어하고 마감 전에 일을 마치려 애쓴다. 이건 INFP 특성 중 '남 눈치를 많이 보기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특성에 기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퀄리티를 최대한 높이는 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 상에서는 절대로 마감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위의 선입견은 나에게는 조금 많이 억울하다. (그러나 따로 마감이 정해지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역시 부정할 수 없겠다.)
- 음. 솔직히 이건 조금 인정을 해야겠다. 나는 새로운 일 계획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 회사 바깥의 삶에 있어서도 단순히 취미 생활을 누리는 걸 넘어서 나만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편이지만 그중에 끝까지 목표를 완수하는 건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도 회사 생활에서는 조금 다르다. 나는 늘 계획만 번지르르하기 때문에 두 가지 방법으로 나 스스로를 제어한다. 첫 번째는 계획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고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그 계획이 무척 중요하다 하고 생각한다면 최대한 책임감을 스스로에게 쥐어주기 위해 널리 알리고 업무 목표로 공식 등록하는 것이다. "나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다"는 것도 INFP의 특성 중 하나이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파트장과 팀장에게 계획을 알리고 kick off 보고를 하기 때문에, 해당 건은 결국 마무리를 해야지만 연말 평가 때 나의 성과로 인정이 된다.
*물론 위의 세 가지 사례들과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MBTI에서는 나의 '강점'이라고 진단해주는 데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내용들. 예를 들어 INFP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질 때 완벽주의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라고 하는데 나는 완벽 주의와는 먼 사람이다. 성급하게 일을 그르쳤으면 모를까.
맨 처음에 밝혔듯이, (나의 경우) 나의 MBTI 유형은 나조차 인정하기 싫은 나의 선천적인 특성들을 정곡을 찌르듯이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검사는 나의 후천적인 노력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MBTI의 유형이 팀원들 간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섣부른 선입견으로 업무 능력을 판가름하는 데 사용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 직장 생활을 가장 힘들어한다는 INFP이지만 나의 꿈은 정년퇴직인걸?
이 글을 쓰기 전에 '재미로 보는' MBTI 별 소득 차트가 있어서 봤더니 전체 16가지 유형 중에서 INFP가 가장 돈을 적게 버는 유형이라고 한다. 재미로 보는 거라지만 또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내가 돈 욕심 없는 거 어떻게 알았지. 연봉보다는 내가 재미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나에게 더 중요하다는 거, 회사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