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쓰지 않고 감각하는 언어들
- 기획자 : 개발자님, 서비스 A의 1차 기능 구현을 어제까지로 요청했었는데, 따로 연락을 못 받아서요. 혹시 완료되었을까요?
- 개발자 : 서비스 A… 그게 어떤 거였더라. 잠시만요. 아, 그거 목요일까지 아니었나요?
- 기획자 : 이거 제가 지난주 금요일에도 한 번 전화 드렸었는데. 지급 건이라 월요일까지는 꼭 부탁드린다고요.
- 개발자 : 그땐 제가 정신이 없었고요. 자, 봐 봐요. 지난주에 기획자님께서 메일로 목요일까지라고 요청주셨었네요. 메일 한 번 보시겠어요? “요청 기한 : 4/13일(목)” 그러니 당연히 저는 목요일만 기억하고 있었죠.
분명히 나의 실수였다. 요청 날짜는 제대로 기재했는데 요일을 잘못 표기했던 것이다. 메일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납기 기한에 오타가 발생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나도 조금은 억울한 감이 있다. 분명히 금요일에 통화했을 때, 다음 주 월요일까지 챙겨달라고 당부를 했었고, 개발자도 당시 ‘굳이 기획자님께서 챙기지 않으셔도 알아서 지금 작업하고 있다. 월요일까지 문제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메일의 내용을 꼬투리 잡는 건, 본인이 마감일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지키지 못하고 나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금요일에 통화 내용을 따로 녹음해둔 것도 아니고, 증거로 남아 있는 건 서면 이메일 기록뿐. 일정에 차질이 생겼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나 혼자 져야 한다. 그놈의 오타 하나 때문에.
기획자가 되고 얻은 것 중 하나로 커뮤니케이션 강박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고 확실하게. 법무팀, 세무팀, 개발팀, 기획팀, 마케팅팀 등 어느 누가 봐도 착오가 없도록 메일은 쉽고 풀어서 써야 한다. 애매한 단어 하나 때문에 누군가 한 명이라도 f/up 사항을 잘못 이해하는 순간, 그 작은 틈은 무심할 정도로 거대한 나비 효과를 일으켜 프로젝트를 망치기도 한다.
메일은 그나마 낫다. 중요한 의사 결정이 구두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뤄질 때, 나는 어깨가 굳어질 정도로 긴장을 한다. 무대 공포증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인지, 아무리 여러 번 발표를 해도 나는 늘 똑같이 떨리고 얼굴이 빨개진다. 미리 준비한 메시지만 간략하게 전달하면 되는데, 어쩌다 예상치 못한 Q&A라도 하게 되면 정신이 블랙아웃이라도 된 듯이 나도 이해 못 하는 소리를 횡설수설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했지?”라고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자기계발서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 있다. 괜히 약점을 개발할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너의 강점을 더욱 키우라고. 그러나 그 약점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면 예외를 만들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전문직이 아닌 일반 직장인의 업무 능력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임을 알기에, 분하지만 품고 가야 하며 기왕이면 계속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퇴근 후에 내가 시를 읽는 것은 일종의 반항 심리가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납기’, ‘기한’, ‘요청 배경’과 같은 단어들은 치워두고, 시도 때도 없이 ‘죄송하지만’, ‘양해를 부탁드리고,’ 라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건넬 필요 없이, 내 요청은 하나도 안 들어주고 맨날 핑곗거리만 찾는 담당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하지 않은 문장들을 나는 필요로 한다. 문장의 기능보다는 이미지에만 몰두하고 싶다.
“시의 유일한 목적은 이미지이다. (중략) 시는 이미지들의 융해이지 개념의 교환이 아니다.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시쓰기와 무관하다. 시쓰기는 감각 활동이지 사유 활동이 아니다.”
(p176, 《타인의 자유》 김인환 – 난다출판사)
오늘도 누군가 잘못 전한 말 한마디 때문에 여러 부서가 고초를 겪었다. 말실수 한 당사자도 너무 바쁘고 정신없던 와중에 빚어낸 실수라, 그 사정을 이해하는 나는 왠지 그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그를 탓하기에 평소의 내 모습도 그다지 당당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창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해부극장2,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한강 – 문학과지성사)
하루 동안 경솔했던 우리들의 혀와 입술을 탓하는 대신에, 오해의 단초가 되었던 단어 하나를 곱씹는 대신에, 이미 내뱉은 말을 후회하고 내뱉지 못한 말에 미련을 두는 대신에 나는 사유하지 않는 시의 문장들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정화한다. 시의 효용이라는 건 어쩌면, 고요한 밤의 문장으로 시끄러운 낮의 문장을 지우는 데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