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트레바리에서 고전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업무에 도움되는 책 도움되지 않는 책

by 선의

올 봄, 우리 회사의 점심 시간은 조금 특별했다. 코로나의 여파는 업무 회의나 출장뿐만 아니라 식사와 휴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 팀은 이제 더 이상 단체로 사내 식당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저마다 도시락, 샌드위치를 싸오거나 편의점에서 김밥을 한 줄 사 와서 자리에서 간단히 해결하고는 했고, 몇몇 직원들을 이 기회에 샐러드를 챙겨 오며 오랜 숙원 사업인 다이어트를 결행하기도 했다. 나는 며칠 스타벅스에서 샐러드를 사 왔다가 얼마 못 가서 샌드위치에 귀착하고야 말았다.


김밥이든 샐러드든, 샌드위치든, 자리에서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 남짓이다. 다시 오후 근무가 시작되는 1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빈 회의실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브런치 글을 쓰고는 했다. (올해 상반기에 브런치에 올린 글들은 대부분 회사 회의실에서 작성했다.) 회의실에는 나 말고 함께 글을 쓰는 친구도, 책을 읽는 동료도 함께였다. 회사 내에서 책 좋아하는 동료를 한 명 한 명 발견하는 건 무척 신이 나는 일이었다.


나는 비밀스레 '여의도 X회사 점심 독서 모임' 같은 걸 상상하기 시작했다. 시간 따로 낼 필요 없이, 멀리 이동할 필요 없이, 매 달 두 번 정도 회의실 하나 빌려서 독서 토론을 하면 편하지 않을까. 회사 내에 책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알고 지내면 즐겁지 않을까. 우선 지인들을 모은 뒤 회사 게시판에 홍보 글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5% 정도 꿈틀거렸다. 괜한 일 벌이지 말자는 마음이 95% 였다. 후자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얼마 후 회사 게시판에서 진짜 독서 모임 공지가 올라왔다. 회사 인사팀 주최로 공식적으로 트레바리 모임을 진행한다고 했다. 인사팀에서 매 달 지정 도서를 선정했고, 참석자들은 책을 읽고 한 달 후에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 모임은 없이 독후감만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오전 9시부터 30명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에 나는 8시 58분에 알람을 맞춰놓은 후, 9시에 게시글이 뜨자마자 클릭을 했다. 그러나 제일 먼저 신청을 하는 건 조금 부끄러웠으므로(신청 댓글을 달면 이름과 소속이 공개된다), 조금 기다렸다가 무난하게 12번째 정도로 댓글을 달았다.



보아하니 트레바리라는 독서 모임은 최근 꽤 잘 나가는 모임 중 하나인 것 같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활동할 수 있는 유료 모임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면 나는 한 번도 참가한 적도 없으면서도 괜스레 기분이 들뜨고는 했다. 책 읽는 걸 무지막지 좋아하는 사람으로 독서 인구가 늘어난다는 건 역시 기쁜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학교 선배가 트레바리 모임을 나가고 있다고 들었던 순간 나는 왠지 그 선배와 더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매번 책을 읽고 독후감도 쓰고 토론도 하신다는 거잖아요. 정말이지 멋져요! 그러나 정작 나는 비용 문제로 선뜻 가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트레바리 활동은 무료였다. 심지어 신청자들에게 모두 지정 도서를 그냥 준다고 했다. (회사와 트레바리는 어떤 사업 모델로 계약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매 달 지정 도서가 발표되길 기다렸다. 네 달째쯤 지나니까 선정된 책들의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시태그를 달면 이런 식일 것이다.


#자기계발#경제경영#신간#베스트셀러


한 권 한 권,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는 목록들이다. 무척 자연스러운 선정 결과이기도 하다. 마케터, 개발팀 연구원, 기획자, 영업직원, 법무팀 변호사 등 다양한 직무의 직원들이 속한 대기업에서 한 달에 한 번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도서에는 어느 정도의 제약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저자의 정치적이거나 사상적인 성향이 조금이라도 묻어 나오는 에세이는 제외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스릴러, 장르 소설을 고를 수도 없을 것이다. 진입장벽이 높고 읽는 데 오래 걸리는 벽돌책도 곤란하다. 역시나 직원들의 업무 능력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기 계발서(ex. 커뮤니케이션 관련 도서), 혹은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가벼운 경제서 (ex.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가 딱이겠다.


그런데 나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코로나 이후의 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서 말고,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는 건 안되려나?


함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떠올리며 묵혀두었던 꿈을 떠올려 보는 것은? 혹시라도 직원들이 <달과 6펜스>를 읽고 주인공인 스트릭랜드처럼 일과 가족을 모두 내팽개쳐버릴까 걱정이 된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저마다 일을 대하는 마음 가짐에 대해 되새겨보아도 좋겠다.



사실 위의 질문은 아주 오래 동안 나의 화두 중 하나였다. 매일매일 내가 읽고 있는, 업무와는 전혀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는 고전 소설, 과학, 철학, 예술, 인문학 분야의 책들이 어떻게든 돌고 돌아서 나의 일에도, 회사 내에서 나의 업무 능력에도 영향을 주고 있을지 궁금하다.


지난달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양자 역학에 관한 기본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찾아서>를,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고전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사전 지식 없이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최혜진 작가님의 <우리 각자의 미술관>, 임솔아 시인의 시집 <겟패킹> 같은 책들을 직원들에게 함께 읽자고 권유할 수 있을까? 혹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모두에게 밀어붙이는 역효과가 날까? 그런데 그럼 과연 '자기계발 - 경영서'는 취향을 타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난한'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지금도 계속 찾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좋은" 책을 다양하게 읽는 것이 회사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세워둔 상태다. 그동안 고민하고 도출한 몇 가지 근거들은 아래와 같다 :




1. 고전 소설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읽는 사람마다 저마다 감상 포인트가 다르다. <페스트>, <달과6펜스>, <자기만의 방>과 같은 소설을 읽은 후 각자가 어떤 지점에서 마음이 동했는지, 읽으면서 생긴 질문들을 공유하다보면 서로의 차이를 실감할 수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공감을 할 수도 있겠다. 이만한 커뮤니케이션 교육이 또 있을까.


2. 다양한 분야에 걸쳐 책을 읽다 보면, 나에게 생소한 분야를 처음 접할 때 두려움 보다는 설렘을 느끼게 된다. <열 한 계단>의 저자 채사장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식만이 내면에 균열을 일으켜 나를 한 계단 성장시킬 수 있다'고 했다. 개발자가 인문학 책을 읽고 기획자가 자연과학 책을 읽고 변호사가 음악 책을 읽기도 하며 매번 낯선 지식에 부딪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이슈가 터지더라도 조금은 덜 당황하며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3. 인내심! 고전 소설이라고 모두에게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고전 소설들은 지루하다.) 원래는 책을 읽다가 본인에게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면 언제든 덮어버리는 게 좋다. 그러나 가끔 정말 유명한 고전 소설을 끝까지 다 읽어낸 뒤, 왜 재미가 없었는지,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건 어떤 건데 이 책은 어째서 나랑 맞지 않았는지 적어두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언젠가 다시 읽었을 때 취향이 바뀐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한다. 나에게는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가 그랬다.) 그렇기에, 가끔은 좋은 책을 완독하며 길러낸 인내심으로 긴 회사 안에서 계약서와 서비스 약관들, 사내 트렌드 보고서와 같은 문서들을 더욱 꼼꼼하게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요하다. 이 글이 우리 회사 트레바리 담당자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담당자님, 다음 달 책으로 고전 소설 한 권만 픽해주실 수 없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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