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공포증 극복 못 하기

망한 무대와 잘 한 무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무대

by 선의


살면서 나를 참 끈질기게도 따라오며 괴롭혀왔던 무대공포증에 관하여 가장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말은, 무대공포증은 어떻게 해도 고치기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 공포증에 맞서 싸워 끝끝내 무대공포증에서 해방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이 건 네가 어떻게 애쓴다고 해서 고칠 수가 없어”라고 체념하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무대란 무대는 죄다 피해 다니는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발표 직전만 되면 아무리 복식 호흡을 하고 허리를 쭉 펴고 ‘너네 다 별 거 아니야 내가 짱이야’ 라고 최면을 걸어봤자 침착해지지 않는 나의 심장 박동을 그저 안고 살아가기로 했다는 뜻이다.


망한 무대


유치원 때부터(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유독 내성적인 아이 었던 나는 자라면서도 크게 성격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결국 무대공포증으로 인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으로 망한 무대의 주범이 되어버리는 경험도 겪었다. 나는 대학교 때 학생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대학교 캠퍼스를 단체로 찾아온 중고등학생들에게 학교의 연혁과 대학생 라이프에 대한 실내 오리엔테이션을 해준 후, 조를 나누어 캠퍼스를 한 바퀴 둘러보는 캠퍼스 투어를 해주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한창 공부 말고 딴짓이 더 하고 싶을 중고등학생들에게 대학교에 대한 꿈과 환상을 심어주어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를 해주는 일이었다.


그중 실내 오리엔테이션은 적게는 50명, 많게는 2천 명도 넘는 아이들 앞에서 학교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과정이었는데, 보통은 스무 명의 홍보대사 안에서 번갈아 가며 한 번에 한 명씩 사회를 맡았다. 그중 사회를 유독 탁월하게 잘 보는 사람도,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는 사람도, 시시각각 기발한 유머로 좌중을 사로잡는 사람도 있었고, 계속 무대에 설 기회를 미뤄가며 야외 캠퍼스 투어에만 올인하는 나도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서서 사회를 보는 건 홍보대사의 기본 역할이자 책임 중 하나였다.


결국에는 언제까지 미룰 수만 없는 날이 닥치고야 말았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중간 규모의 계단식 강의실의 단상에 올라섰다. 내 앞에는 백 명 가까이 되는 남자 중학생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 기회다 싶어 조는 친구들도, 자기들끼리 지방 방송을 하는 친구들도 보였다. 그 와중에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나에게 집중하는 친구들도 보였다. 이 집중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발표를 하면 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이들에게 발표를 시작했다.


결과는 정말이지 처참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목소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중간중간 나는 대놓고 심호흡을 하며 목소리를 잡아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곧 마이크를 쥔 나의 두 손이 함께 떨렸고, 간신히 내 몸을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도 부들부들거렸다. 그 떨림은 정말이지 티가 많이 났다. 강의실 앞의 백 명의 중학생들 모두가 알아보았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발표를 이어나갔다. 관중은 점점 집중력을 잃었다. 정 못 봐주겠으면 잠이라도 잤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러나 관중들은 자기들끼리 삼삼 오오 떠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세 명의 중학생들과 눈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그들은 나와 시선이 닿자마자 픽 하고 비웃더니, 나를 곁눈질하며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그 비웃음은 나만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웃음을 목격한 그 순간, 나는 무너졌다. 더 이상 버텨내다가는 백 명의 중학생들 앞에서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지막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학교 캠퍼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마쳤습니다. 이다음 내용부터는 모 홍보대사가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무대 옆에서 열심히 컴퓨터로 스페이스바를 치며 PPT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홍보대사 친구는, 이 계획에 없었던 상황에서도 어쩌면 예상했다는 듯, 나 대신 무대 위로 올라와주었다.


이 날 나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곧바로 이어질 캠퍼스 투어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혼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다시는 무대 위로 오르지 못했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그 후부터는 외국인 방문객 전문 투어를 맡았으며, 내가 아닌 누구든 영어 투어를 할 수 있도록 영어 투어 매뉴얼을 상세히 작성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대학 생활을 마칠 때까지, 백 명 넘는 관객을 앞지고 무대 위에 올라 발표를 할 일은 나에게 더 이상 없었다.



잘 한 무대


그리고 대학교 졸업 식 한 달 전, 이미 채용이 되어 참석하게 된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교육에서 나는 삼백 명의 동기들 앞에 서고야 만다. 그리고 발표는, 솔직히, 꽤 성공적이었다.


그건 무척이지 의외의 경험이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쫄딱 망했던 홍보대사로서의 무대 이후, 처음으로 발표장 위에 올랐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 자체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대공포증이 그새 저절로 치유된 것도, 대학 생활을 더 경험하면서 내가 더 베짱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하고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함께 교육을 받는 신입사원 동기들은 대략 삼백 명이었다. 한 팀에 열다섯 명씩, 총 스무 팀으로 나뉘어 우리는 일주일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며 함께 교육을 받았다. 교육 기간 시작되고 중반쯤 되었을까, 여느 직원 교육에서 모두 진행할 법한 “신제품 아이디어 기획” 과제가 주어졌다. 자료는 다 함께 만들되, 발표자는 당일에 직접 교육 진행자가 직접 추첨하여 정한다고 했다. 우리 팀 열 다섯 명 중 누구의 이름이 불릴지 모르는 상태였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던 친구는 내심 본인이 발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보였지만, 그 옆에서 나는 역시나 긴장했다. 그렇지만 열 다섯 명 중 한 명의 확률이었다. 설마 나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발표 예정시간 몇 시간 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안내 사항을 전달받았다. 발표는 모두 영어로만 진행된다고 했다. 모두를 좌절하게 한 소식이었다. 우리 팀은 대부분이 이과 출신, 문과생은 나 포함 세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에 외국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다들 웃으며 장난스레, 그러나 진심으로, 한 목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나만 아니게 해 주세요...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팀은 선의가 대표로 발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모든 시선들이 나에게 모였다.


망했구나, 나는 생각했다.


곧 삼백 명이 대강당에 모였다. 교육 진행자는 각 조의 발표가 시작되기 직전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 발표자를 호명했다. 1조의 발표자의 이름이 불리고, 교육장 맨 왼쪽 앞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남자 교육생 한 명이 좌절하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간신히 영어 단어들만 몇 개 나열하며 배정된 시간의 절반만에 끝내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2조, 이름 하나가 불리고,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고, 또 한 번 단문으로만 구성된 발표가 진행되었다.


This is new idea. Look at this(포인터로 슬라이드 위쪽을 가리킨다). We think, it is good product.


물론 모두가 이랬던 건 아니다. 그중에는 공대 출신 개발자인데 한국식 영어발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다 하는 동기도 있었고, CNN 아나운서와 같은 발음과 속도로 팀의 아이디어를 소개했던 미국 유학파 출신의 동기도 있었다. 추후 친해지게 된 내 입사 동기도, 어학연수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지만 나보다 훨씬 유창한 발음으로 발표를 마치고 내려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표자들에게는 아쉽게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국어가 아닌 영어라는 이유만으로, 그날의 발표는 대체로 어설펐다. 우리 팀은 순서 상 후반부에 속해있었다. 나는 우리 차례를 기다리면서, 조금의 자신감을 얻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정말로 내 이름이 호명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팀이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열 다섯 명 중 하나의 확률. 교육 진행자는 추첨 프로그램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 팀은 환호를 질렀다.


그 날 나는 여전히 많이 떨었지만, 그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가 준비한 발표 내용을 모두 전달한 후 무대에서 내려왔다. 발표가 모두 끝나고, 동기들은 모두 박수를 쳐주었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그 후 달라진 것


이 무대를 계기로 내가 무대공포증을 극복했냐고 묻는다면 정말이지 그 후로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입사를 한 후 나는 삼백 명 앞에 설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고작 다섯 명의 파트너사 방문객을 앞에 두고 한 발표에도, 우리 부서 임원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 보고에도 매번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또 많은 발표를 참관했다. 여러 번 직무 교육, 진급 교육을 참석하면서, 그리고 동료들의 발표를 지켜보면서 알게 된 건, 꼭 목소리가 안정되어야만 좋은 발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센스 있는 유머로 발표 처음부터 좌중의 관심을 사로잡아도, 얼마 못가 발표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외국 클라이언트 앞에서 네이티브 발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그래프와 숫자가 맞지 않아 발표자가 금세 신뢰를 잃어버리는 상황도 목격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잘할 수 있는 발표를 한다. 중요한 자리일수록 목소리는 더 떨리지만, 그만큼 내용 구성은 빈틈없게,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콘텐츠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한다.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 – 그렇게 오래 하다 보면 언젠가 ‘무대 공포증 극복한 후기’의 글을 또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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