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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May 22. 2020

계획에 없었던 입사 10년만의 휴직

그리고, 예상치 못한 행복감

갑자기 하루에 열 시간의 자유 시간이 '더' 추가되었어요


2010년 1월. 아직 대학교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사무실에 첫 출근한 스물다섯 살의 나는 내가 이렇게나 오랫동안 한 회사를 다니게 될 줄 몰랐다.


거짓말이다. 그때의 나는 언젠가 이 회사의 임원이 되고 또 CMO(Chief Marketing Officer)도 될 것이라며 패기와 열망과 애사심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마음은 채 일 년도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 후 아마도 이백 서른 여섯 번 정도쯤 되는 퇴사 욕구를 참아내며 나는 십 년을 버텨왔다. 가장 간절하게 이직을 하고 싶었을 때는 내가 가고팠던 회사에서 나를 뽑아주지 않았고, 막상 헤드헌터의 연락이 가장 잦았을 시기는 내가 막 부서를 옮겨 일에 재미도 느끼고 안정감도 얻었을 때였다.


2010년의 내가 정말로 몰랐던 것은, 2020년의 내가 불쑥 시험관 시술을 위한 무급 휴직을 신청하게 되리란 것이었다. 진짜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지만 - 참 알 수 없는 거지, 삶이라는 거.


어쨌든 나는 울며 보채는 아이도, 주위에 아파서 돌봐야 할 사람도 없이, 가끔 병원에 다녀오는 것 외에는 집에만 콕 틀여 박혀 쉬고 있다. 휴직 전에도 퇴근 후에는 집에서만 쉬는 집순이였지만, 통근 시간과 업무 시간까지 빠져 하루에 10시간의 자유 시간이 '더' 추가되었다.


아침에는 잡지를 읽고, 시를 필사하고, 중국어 단어를 외우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운동하고, 두꺼운 철학 벽돌책을 꺼내 공부한다. 점심에는 버터와 마늘과 함께 구운 양배추 스테이크나 차돌박이와 배추를 넣은 샤브샤브, 간을 최대한 적게 한 토마토 계란볶음 같은 걸 요리해서 먹는다. 날이 좋으면 아파트 단지를 돌며 조깅을 하고 TV로 유튜브를 켜서 홈트 영상을 따라 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 나만 원한다면 매일 하루 종일 넷플릭스만 정주행 하며 놀고 낮잠을 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특별한 미션이 주어진 휴직


매일 출퇴근하고, 퇴근하면 아이를 챙기고, 자기 전까지 혼자서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30분 정도도 내기 어렵다는 나의 친구들은 지금 나의 하루를 보며 참 상팔자라며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2016년부터 난임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2018년 1월에 첫 시험관 시술을 했고 총 아홉 번 (아홉 번 맞나 이제는 세는 것도 헷갈린다)의 시술을 받았는데 모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내가 부러울까. 2년 반 동안이나 회사와 시험관 시술을 병행하면서 수없이 팀원들 눈치를 보고, 테스터기 한 줄을 확인하며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울다가 끝내 무급 휴직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무급 휴직이라 회사에서 병원비의 급여 항목도 지원해주지 않았는데 정부가 지원해주는 시험관 시술 회수를 모두 써버려서 이제 병원비를 모두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내가 부러울까?


어쨌든 '임신'이라는 특별한 (내 맘대로 안되는) 미션이 주어진 휴직이기는 하지만 나도 하게 되었다, 휴직. 이백 서른 여섯 번 꿈을 꾸었던 퇴직은 아직이지만, 어찌 되었든 입사 10년 만에 회사를 벗어나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글은 아침에 민음사의 인문학 잡지 <한편>을 읽고, 점심에 합정 알라딘에 가서 중고 책을 몇 권 판매하고, 합정역 리김밥에서 고구마 김밥을 사 먹고, 집으로 돌아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한 시간 조깅을 하고, 아파트 단지 내 정자에 앉아 바람에 땀을 말리며 한 시간 동안 보들레르의 산문시집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쓰는 글이다.


역시 삶은 참 알 수도 없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다. 2년 동안 회사에 출퇴근하면서 시험관 시술을 병행하는 동안 (동시에 육아를 하는 동료들, 육아 휴직에서 돌아온 팀원들, 임신 소식을 알려주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동안) 나는 참 불운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충분한 여유 시간을 누리며 나는 매일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행복하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꿈 같은 시간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혼자 집 안에서 작은 노트에 시간표를 짜고 목표를 세우며 나름 분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추가된 매일 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꾸준히 브런치 매거진을 통해 정리하고 기록할 예정입니다. 또한 이 기회에 그 동안의 회사 생활을 반추하며 제 본업인 서비스 기획에 대해서도 부지런히 고민하고 정리해보려 합니다.


세상이 궁금할 때는 책을 읽고, 나 자신이 궁금할 때는 글을 쓰는 것. 해보니까 이 방법이 저에게는 제일 잘 맞더라구요.)


(제목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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