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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Jul 10. 2020

오늘의 신문 헤드라인이 아침 출근길에 미친 영향에 관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괴벨스의 비서, 그리고 대한민국

눈을 뜨자마자 참 어질어질한 아침이다. 이번주는 참 세다.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으로서 몸을 세게 때려치는 듯한 뉴스가 우르르 쏟아져나온 한 주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머리가 핑 돈다.


사방에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성인이 유아를 성폭행하는 아동 성착취 비디오를 25만개 이상 공유하는 웹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는 44억 이상의 불법 이익을 벌어들여 실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한 결과 7월 6일 석방되었다. 가해자는 눈물을 흘리며 법원에 "감사하다"고 했다. 해당 사이트의 인기 검색 키워드는 '6개월', '2살'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 무료변론으로 승소시킨 인권변호사가 어제는 성추행 의혹으로 고소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가 실종이 되었다가 결국 숨진 채 발견되었다. 누구는 그럼에도 한 사람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고, 누구는 비겁했다고, 누구는 어렵게 용기 낸 성추행 피해자분을 생각하며 끝까지 잔인한 자살이었다고 한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너무도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정당할 때, 내가 끝까지 굳게 믿었던 신념이 배신당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역시 사법부도 정치판도 믿을 게 못된다고, 혀를 끌끌 차며, 혹은 크게 분노하며 SNS에 감정을 토로한 이후에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인가. 나는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당장 사회 운동에 참여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동안 아무리 짜증이 나고 답답한 뉴스를 접해도 결국 매일 회사로 출근하는 게 고작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아침 커피를 마시며 어젯밤 뉴스 기사에서 다룬 일들에 대해 수다를 나누다가 몸을 컴퓨터를 향해 돌리고 이메일을 열면 끝이었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를 비껴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n번방의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거지. 나는 자꾸 토가 밀려나오는 걸 꾹 참으며 긴 취재기사를 끝까지 읽었다. 믿기지 않은 참혹함 때문에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었다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오래동안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던 책을 하나 떠올렸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홀로코스트의 전범자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결과로 "악의 평범성"을 정리한 한나 아렌트의 책이다.


내 일은 아닌 과거로서, 역사로서의 홀로코스트

재작년, 나는 처음으로 홀로코스트를 접했다. 물론 그 전까지 제2차 세계대전, 나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고, 그 동안 이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을 다양하게 접하며 성장해오기는 했다. 어릴 적 노래가 너무 좋아 따라부르려고 여러 번 돌려봤던 영화 <Sound of Music>도 그렇고 어린 소녀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 너무 풋풋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번 읽었던 『안내의 일기 - 안네 프랑크』도 알고 보면 모두 같은 역사를 다룬 컨텐츠였다. 그러나 2018년부터 나는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시작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저서 일곱 권을 몰아서 읽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인권과 인간성이 비참하게 무너져내리는 장면들을 텍스트 너머로 목격했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나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과 같이 수용소 안의 생활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들도 찾아 읽었다.  


(수용소의) 하루는 이 검사, 의복 수색, 옴의 진찰, 아침 세면 등 수없이 강압적으로 옷을 벗어야 하는 일들로 가득했다. 맨발에 벌거벗은 인간은 온몸의 신경과 힘줄이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속수무책인 먹잇감이다. 비록 배급받는게 더러운 옷이라 해도, 밑창이 나무로 된 형편없는 신발이라 해도, 의복이란 보잘것없지만 필수불가결한 최소한의 방어다.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 (p137)

-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돌베개 출판사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예전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도 있었구나. 정말 끔찍한 '역사'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 없는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들이 지금까지도 자꾸 반복되는 것만 같지.



그저 부지런했을 뿐, 잘못한 것이 없다는 홀로코스트의 가해자

지난 5월, 휴직을 하고 나선 이와는 다른 관점의 책을 두 권 읽었다. 늘 읽으려고 벼르고 있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한 달동안 조금씩 읽었고,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전직 비서 브루힌델 폼젤의 기록을 담은 『어느 독일인의 삶』를 하루 동안 읽었다. 이번에는 희생자가 아닌 가해자의 관점에서 보고 싶었다.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예상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저 위에서 주어진 지시를 '생각 없이' 부지런하게 이행한 자였으며,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다고. 옭고 그른 것을 가리는 판단 능력이 없었으며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이 없었던 것이라고. 어떠한 '악의'도 없었지만 그저 근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p391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한길사 출판사


괴벨의 비서였던 폼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이히만과 참 비슷한 면이 많다는 것이 보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당신에 우리가 탄압받던 그 불쌍한 유대인들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고 말이에요. 그 사람들도 막상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 다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유대인 탄압도 그 중 하나였지만, 그 밖에 다른 일도 많았어요. 거기다 전쟁에 나간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늘 달고 살았죠. 사죄할 일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어느 독일인의 삶』 브루힌델 폼젤

"다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어요."


돌아보면 그렇게 험악한 시절을 지나온 건 참 힘든 일이었어요. 결국 남은 건 내 삶이자 내 운명 뿐이었어요. 결국 다들 항상 자기 자신만 생각했죠. 그럴 때면 난 간혹 양심의 가책이 일면서 이 모든 게 어쩐지 우리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다음엔, 그래도 넌 이 모든 것에서 항상 잘 빠져나오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였어요.

- 『어느 독일인의 삶』 브루힌델 폼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일었지만 그래도 넌 이 모든 것에서 항상 잘 빠져나오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였어요."


그녀는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일로 괜히 심적인 부담감을 안기도 싫었고요





나는 나에게 서비스 기획이라는 업무가 잘 맞는지 고민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면 가장 즐거울까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인정도 받고 싶고, 사회 생활 하는 거 무척 피곤하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잘 어울리며 회사 다니고 싶다. 아이도 갖고 싶고 좋은 가정을 꾸리고 싶다. 아마도 살아가면서 '일상', '현실'이라는 단어와 연계된 고민이 단 하나도 없는 날은 하루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직장내 성희롱이나 크고 작은 형사 사건들에서 운이 좋게 빗겨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나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양심의 가책이 슬쩍 일어도 내 일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관심 갖고 사유하고 때로는 마음이 불편해도 기꺼이 감수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뭘 할 수 있지.)

앞으로도 꽤 많은 출근길에 머리가 복잡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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