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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Sep 11. 2020

직장인에게 필요한 휴가는 최소 3개월

휴직을 해보니까 드디어 나를 알겠다

예전에 회사에서 호주 지역 사업을 담당했을 때는 연말마다 시간이 남았다. 옆자리에서 미국이나 러시아 아시아 지역을 맡은 동료들이 연말까지 계약을 완료하고 매출을 정산하느라 정신없어할 때 나는 여유롭게 업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며 숨을 돌렸다. 그러나 사무실 안에서 제일 한가했음에도 나는 시간의 상대적 궁핍함을 느꼈다. 호주에 있는 나의 파트너들은 한 달 두 달째 휴가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말쯤에 파트너에게 메일을 쓰며 그의 동료들 몇 명을 Copy로 추가하면, 그중 두 명 정도로부터는 1분 안에 자동 발송 메일이 왔다.


나는 지금 스키를 타고 있어요.
모두 연말 잘 마무리하고 해피 뉴 이어 되길 바랍니다.


(*호주의 모든 직장인이 이렇게 오래 동안 휴가를 쓸 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 파트너사들이 콘텐츠 / IT 업계 쪽이라 조금 더 자유로웠을지도.)


11월 말에 미리 연말 인사를 보내는 여유라니. 나도 학생 때까지는 똑같이 두 달 세 달 방학도 누리고 했었지만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어느새 한 달의 휴가조차 환상이자 망상 속의 이데아가 되어 버렸다. 보통 나에게 주어지는 여름휴가는 일 년에 딱 한 번, 일주일을 내면 양쪽 주말 껴서 총 9일을 쉴 수 있다. 만약 운이 좋으면 추석과 같은 공휴일을 붙여서 2주까지도 쉴 수도 있다.


그런데, 지구 저쪽 편으로 가면 두 달이나 휴가를 쓸 수 있는 나라가 있단다. 질투가 났다. 나에게 딱 한 달의 휴가라도 주어진다면 정말이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휴직을 해보니까 이제는 알겠다. 한 달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두 달도 여전히 부족하다.


모든 직장인들은 적어도 세 달은 쉬어야 한다.



나의 경우, 시험관 시술이라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낸 무급 휴직이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딱 십 년 만에 누릴 수 있었다. 한 달에 다섯 번에서 일곱 번 정도 병원을 다녀오는 일 외에는 모두 집에서만 머물렀다. 무급 휴직자로서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24시간 재택 휴직자로서의 생활이 이제 4개월째 접어들었다.


나의 지난 3개월을 돌이켜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 2주

휴직 기간 중에 마음껏 쉬고 책도 읽되, 정량적인 성과를 하나 남기기로 했다. 충분히 리프레시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것도 좋지만, 복직했을 때 '마음의 양식만 풍성해진 채' 돌아가는 것이 다소 불안했다. 중국어 자격증 HSK를 취득하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에 두 시간 공부하는 것도 버거웠으며, 남은 시간들은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푹 자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었다.


3째 주 ~ 1달째

하고 싶은 일이 계속 생겨서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이 시간에 클래식 음악도 배우고 싶고 외국어도 중국어 말고 또 여러 개 익혀 두고 싶고, 철학이나 세계사 벽돌 책도 하나씩 공부해서 기본 교양을 쌓아두고 싶고, 블로그도 만들고 싶고,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매 시간 별로 스케줄을 적어둘 수 있는 데일리 플래너를 샀다. 삶의 의욕이 불타올랐고, 매일 하루하루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다.


2달째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기에는 하루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깨닫자 우선순위가 잡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면 꼭 중요한 일들 몇 개(중국어 공부, 영어책 낭독, 브런치 글 쓰기, 마감이 정해진 책 읽기)를 다 완료하고 나서 시작하자고 마음먹은 후로 점점 우선순위가 낮은 일들은 하지 않게 되었다. 하루의 루틴이 어느 정도 잡히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차투리 시간에 스페인어 공부를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3달째 ~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면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과정이라든가 프로그래밍 기초 과정을 3개월 안에 충분히 이수했을 수 있었는데도, 나는 그 시간에 중국어를 공부하는 걸 선택했다. 휴직 직전에 사내 파이썬 과정을 등록했다가 딱 두 강의 듣고 그만둬야 했던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내가 하기로 선택한 것보다 내가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들을 통해 나 자신을 더욱 잘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덕에, 3개월의 휴직 기간 끝나고 나는 다시 3개월을 연장해야 했다. 또 한 번 주어진 3개월을 이번에는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한 번 더 고민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터넷의 온라인 강의와 자격증 취득 준비 기간을 알아보았다. ㅍ사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온라인 완주반이 90일이고 코딩, 알고리즘 완주반이 70일, 서비스 기획 완주반이 60일이다. ㅎ사의 소설 쓰기 수업은 12주에서 16주까지 진행된다. HSK 5급을 막 취득한 사람이 6급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시간은 최소 3개월이다. 무엇이든 하나를 배우려면 최소 3개월은 필요하다.


김영민 교수의 최근작 『공부란 무엇인가 - 어크로스』에는 <연구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라는 장이 나온다. 미국 대학에선 정규직 교수들이 매 3년마다 1년의 연구년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처럼 양호한 연구년 정책의 바탕에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하려면 연구를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p114). 3년마다 1년의 연구년은 바라지도 않는다. 3년마다 3개월, 그게 어렵다면 5년마다 3개월의 휴가가 직장인들에게도 주어졌으면 좋겠다. 현실을 생각하면 10년마다 3개월의 휴가도 어렵겠지만...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하다가, 그중에 자연스럽게 우선순위를 정리하고, 결국 내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기까지는 3개월이 필요하다. 12년째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고 있는 나의 남편도, 20년 넘게 회사에 몸 바쳐 일하고 있는 우리 팀장님들도 딱 3개월만 익숙해진 회사 일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우리는 한 달 뒤, 10월 말쯤에 이런 자동 발송 메일을 작성해둔 채 떠나는 거다.


나는 지금 조금씩 더 나다워지고 있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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