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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Jul 03. 2020

휴직을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일들

반복적인 일상에  별 거 아닌 루틴 하나 더하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feat. 레이먼드 카버)


요즘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일들은 휴직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시도한 일들인데, 생각해 보면 회사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다. 이를 테면 아파트 단지에 심어진 꽃의 이름을 알아내는 일. Daum에 꽃 사진을 찍으면 꽃 이름을 찾아주는 기능이 있다는 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휴직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기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식물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나는 튤립이나 장미, 벚꽃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겨우 알았지 철쭉이랑 산수국이 이토록 다양한 색깔을 머금고 있는지는 여태 몰랐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 소설 《체공녀 강주룡》을 쓴 소설가 박서련의 저자 소개 글을 보고 무척 탐이 난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1989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2015년 단편 <미키마우스 클럽>으로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일기와 박물지를 쓴다.' 당시 박물지라는 단어가 궁금해서 검색해보았더니 '동물, 식물, 광물, 지질, 기상 등의 자연적인 사물 현상을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이다'라고 써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박물지를 쓰기 시작한 건 아니지만, 매일 보는 주변의 식물들 정도는 이름을 하나씩 알아두기로 했다.



종종 클래식을 듣고 음악 노트를 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구분 못하는, 클래식 음악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내가 클래식에 귀를 기울인다. 올해 나온 책 중에 하루에 한 페이지씩 클래식 음악 하나를 소개해주는 책이 있는데, 해당 책의 출판사에서 유튜브에 해당 음악들을 한 곳에 모아두었다. 매일 짧게는 4분 길게는 8분 정도 되는 음악 클립을 듣고 메모를 해둔다. 다시 말하지만 클-알-못 막귀이기에 메모는 겨우 이 정도 수준이다.


6월 1일.
난 당신을 원해요 Je te veux by 에리크 사티 Erik Satie 1866 - 1925

왠지 익숙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 작곡가 에리크 사티가 카바레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명을 보면서 들으니 사랑이 싹트기 참 좋은 BGM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카바레의 정확한 뜻을 네이버 지식백과에 찾아보니

"Cabaret : 소박한 규모의 선술집으로 옛날에는 주로 와인을 팔았다. (중략) 타베른(tavern)과 카바레의 구분은 17세기경까지 명확했다. 카바레는 이후 그냥 술 한잔 하는 곳이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술과 음식을 곁들일 수 있는 곳으로 발전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유튜브로는 조성진, 손열음 피아니스트,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의 영상들을 찾아본다.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영상을 찾아보면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 하나가 라흐마니노프 Piano Concerto No.2이다. 책을 읽으며 매일매일 틀어놓았더니 자연스럽게 귀에 익숙해졌다. 단골 카페 사장님께 라흐마니노프는 Khatia Buniatishvili의 연주가 특별히 좋다는 추천을 받은 뒤에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연주를 듣기 시작했는데 역시 좋았다. 그래도 솔직하게 쓰자면,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비교하며 들을 수 있을만한 청취력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요새는 손열음 피아니스트에게 꽂혔는데, 그녀가 직접 저술한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를 막 다 읽었기 때문이다. 글을 미친듯이 잘 쓰는 천재 피아니스트라니. 미칠듯이 멋있다.



마블 세계관과 마이클 베이식 블록버스터 영화, 재난 영화, 천만 영화만 보는 내가 "좋은" 영화들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아마게돈>이나 <딥 임팩트>처럼 지구가 행성 충돌 위기로 멸망 직전이지도 않고, <부산행>처럼 좀비떼가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들지도 않고, <어벤져스>처럼 스토리가 전 우주를 무대로 확대되지도 않지만 영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좋은 영화라고 하니까 그 이유만으로 본다. 나로서 <패터슨, 2016> 같은 영화를 보는 건 지루함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다. 반복적인 일상을 다루는 영화. 그 영화를 거실 TV로 틀고 스마트폰 없이 오로지 집중해서 보는 연습을 했다. 인내를 익히는 연습이었다. (그러나 영화 한 편을 다 보고나서 브런치에서 영화의 후기들을 찾아 읽으며 나는 너무도 놀라운 깨달음들 - 아, 그 장면이 이런 의미였구나 - 를 얻었고 그건 지구 멸망이나 은하계 간 순간 이동보다 더 짜릿했다.)



<패터슨 - Paterson, 2016>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건 아무래도 쑥쓰러우니까 마지막에 스치듯이만 언급해야지.) 나는 며칠 전에 생에 첫 시를 한 편 썼다. 음, 초등학생 때 중학생 때 백일장에서 썼던 시는 빼고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쓴 시이다. 내가 시를 쓰다니. 이건 아무도 관심 없는데 나 혼자서 곱씹고 나 혼자서 신이 나는 일이다.




맨 처음 밝혔듯이 이 모든 것들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하고도 남았던 일들이었다. 그 동안 시간이 부족해서 시작하지 못했던 일들이라기보단,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는 일이 그렇게 여유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나 자문해보면,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고 휴가 때는 여행을 다니는 반복적인 하루들이 나도 모르게 너무 익숙해져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처럼 아무 계획도 없이 시간이 많고 넘치는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코로나로 인해 하계 휴가 기간에 해외 여행 가기가 어려워졌다. 그냥 이 참에 집에 틀여박혀서 아 - 무것도 안 한 채 넘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아주 작고 소소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은 습관 하나를 일상에 더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무실 바깥의 세상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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