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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Jun 30. 2020

행복한 재택휴직자

규칙적이진 않지만 게으른 것도 아닌

오 년 전 도로주행 패스하자마자 내팽개쳐진 장롱면허의 부활을 위한 운전 연수. 중국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중국어 회화학원. 나를 마포구의 자타공인 셰프로 만들어줄 요리학원. 그리고 소설 쓰기 수업, 시 쓰기 수업, 가죽 공방, 드로잉 클래스. 아, 나의 오랜 로망이었던 오전 10시의 느긋한 1:1 필라테스 수업도 빼놓을 수 없다. 10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늘 가슴 한 켠에 '휴직'과 '퇴직' 두 단어를 품은 채 "언젠가의 휴식기"를 위한 길고 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두었었다.


다 날아갔다.

왜 입사 10년 만의 첫 휴직을 나는 하필 (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코로나의 시대에 쓰게 되었는지!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은 나의 자기 계발을 위한 휴직도 리프레시 충전을 위한 휴직도 결코 아니다. 난임 병원을 다니기 위해 회사 부서원들과 가족의 양해와 배려 속에서 얻은 귀중한 휴직이기에 투덜대고 있을 수는 없다. 아기를 품을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어렵게 마음 먹고 낸 무급 휴직인만큼, 괜히 사람 많은 곳에 돌아다녔다가 잘못 걸려 코로나 확진이라도 받는다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고 또 망신이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나는 위생과 청결에 초예민해져야만 하는, 그 결과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콕 틀여 박힌 재택휴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집에만 있어도 하고 싶은 일은 너무도 많다. 24시간이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7AM. 아침에는 남편 출근 준비하는 시간에 함께 눈을 뜬다. 정확히는 남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고, 샤워를 하고 드라이로 머리를 말린 뒤 화장실에서 문을 열고 나올 때에 맞춰 내가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불을 네모나게 갠 후, 남편을 따라 옷방으로 들어간다. 남편이 출근 준비하는 내내 나는 분주한 남편의 옆모습에 대고 실컷 치근덕거린다.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은 오 분에서 십 분 남짓. 곧 남편은 출근할 테고 저녁 늦게까지 나는 집에 혼자 남아 있을 테니까, 최대한 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남편이 나가면 나는 아이스커피를 하나 타서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한쪽에는 아이패드로 놀라운 토요일 도레미마켓을 틀고 (얼마 전부터 1화부터 정주행 중이다) 다른 한쪽에는 독서대에 HSK(중국어) 단어집을 펼쳐놓는다. 도레미마켓 한 화는 1시간 20분 남짓. 매일 아침 한 화를 틀어놓은 채 단어를 공부한다. 진...짜... 비효율의 극을 달리는 공부 방법이다. 클래식 음악이라도 틀어놓고 외우면 삼십 분이면 끝낼 것을 한 시간 반 동안 천천히 외운다. 그래도 매일 패널들이 난리 법석을 하며 받쓰(노래 가사 받아쓰기)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부터 책상에 앉게 되는 효과가 있다. 단어를 공부하는 건 덤이고. 느리면 어떻고 덜 외워지면 또 어떤가.


어쨌든 나는 매일매일 하루를 (예능 프로그램을 한 편 보면서) 단어를 외우는 걸로 시작하고 있으니까. (맞죠?)


단어를 외우기 위한 필수템 : 아이패드

이렇게 정신이 쏙 빠지는 아침 단어 공부가 끝나면 출출해진다. 아침 겸 점심은 웬만하면 직접 만들어 먹는다. 배달 어플은 핸드폰에 한 개도 설치해두지 않았다. 대신 미리 사다둔 호밀빵에 마트에서 사 온 딸기잼을 발라먹거나, 냉동실의 초당옥수수이나 고구마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것도 모두 '직접 만들어 먹는' 아침에 포함시킨다. 조금 더 부지런할 때는 에어프라이어에 종이 호일을 깔고 소고기와 버터, 간마늘을 올려 데우기도 하고, 방울토마토에 계란스크램블을 볶기도 하며, 맘이 내키면 닭가슴살에 닭갈비 양념을 더해 구워먹기도 한다. 남편하고 함께 먹을  아니고  혼자만 먹을 거니까,  아낌없이  맛있게,  정성스러우면서도 건강하게 요리한다.


간단한 요리를 하거나 단순한 집안일을 할 때는 BGM으로 중국어나 스페인어로 된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나의 스페인어 실력은 초중급 정도에 머물러 있기에, 대부분 listening 보다는 hearing에 가까운 활동이지만. 귀에 익숙해지다 보면 도움이 되긴 되겠지, 반신반의하며 그저 틀어두는 데 큰 의의를 둔다. 이제 휴직한 지 한 달 반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리스닝에 전혀 도움이 안 된 것 같긴 하지만 어학 공부는 계단식으로 실력이 오른다고 하니까 언제 한 번 실력 향상이 확 체감이 되는 날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아님 말고.



오후와 저녁 시간은 홈트, 중국어 공부, 독서를 섞어서 하며 보낸다. 메인은 중국어 공부와 운동, 사이드가 독서가 되어야 하는데 늘 주객전도가 일상이다. 공부와 운동은 재미가 없고 책은 하루 종일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늘 마음먹은 것보다 공부는 적게, 독서는 많이 한다.


휴직 초기에는 하루의 시간표를 짜보기도 했다. 5분 10분 단위로 촘촘하게 짜두면은 분명 내가 따르지 않을 걸 알고 있어 넉넉하게 한 시간 단위로 일정을 세웠다. 8시-9시 잡지 읽기, 9시-10시 단어 외우기, 10시 - 11시 반 운동, 11시 반 - 2시 점심 시간 및 휴식, 2시 - 3시 반 철학 벽돌 책 읽기 3시 반 - 5시 HSK 한 권으로 끝내기 문제집 풀기 등등등. 나름 일의 우선순위와 바이오리듬 따위(단어를 외우는 건 아침에 잘되고 오후에는 산만해지기 일쑤라 문제집을 풀어야 한다)를 고려하여 철저하게 계획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간표는 3일도 지키지 못했다. 집에 혼자 남은 자유 시간은 너무도 달콤했다. 아침에 잡지를 읽다 보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잡지 대신 그 전날 읽던 책을 이어서 읽고 싶기도 했다. 무엇을 읽든 9시 정각이 되면 땡, 하고 책을 덮고 단어장을 펼쳐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하루는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나를 "아침 공복 운동을 단 열흘하고 7kg를 뺐어요!"의 영상으로 이끌었기에 그다음 날부터 나도 공복 운동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플 때는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아서 금방 포기했다.


나라는 인간은 시간표 그게 뭐 별거라고 그걸 지키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절충안으로 시간대 별 일정을 세우는 대신 '오전 중에는 반드시 단어장 1시간 외우기', '오후에는 저녁 먹기 전에 문제집 3시간 이상 풀기' 등의 규칙을 만들어도 보았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요새는 그저 잠들기 전에 죄책감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공부한다. 하루 정도 공부를 너무 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 다음날 더 열심히 한다.


불렛저널, 나도 안써본 건 아니지만...(출처 : usnplash)



+

매일 최소한의 공부 시간을 채우기 위한 치트키 하나. 저녁 시간에는 무조건 HSK 문제집을 푼다. 여기서 저녁 시간 =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 남편은 내가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있었는 줄 안다. (이런 얘기 맘 편히 쓰고 싶어서 남편에게 브런치 주소 안알려줬지 내가.)




규칙적인 생활은 나에게는 너무 큰 욕심이었다. 그냥 내 몫이 아닌 것으로 치기로 했다. 그러나 나도 무조건적으로 지키는 두 가지는 있다. 하나, 늦잠 자지 않기. 둘, 낮잠 자지 않기. 나는 지금 이렇게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워서 잠으로 허비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종종 주위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 중에 육아 휴직이 길어질수록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다고 (나도 이럴 줄 몰랐는데) 사무실 출근이 그리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있는 체력 없는 체력 다 소모하는 육아 휴직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한 달 반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동안 집에 있으면서 심심하다거나 무기력하다거나 하물며 사무실이 그립다거나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 무섭다. 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일까. 일을 하지 않는 날들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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