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크호스> 리뷰 3. 목적지는 무시하라
대학생 때에의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친구를 하나 꼽으라면, 중국 상하이로 어학연수 가서 만난 한국인 친구 한 명이 떠오른다. 사실 그렇게까지 친한 친구도 아니었는데, 나의 세계를 어쩌면 '깨부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만한 그녀의 한 마디는 굉장히 단순한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승무원이 꿈이었어.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변치 않고 지켜온 꿈이라니. 그런게 가능한가? 초등학교 때 처음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매일 승무원 생각만 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설레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 꿈이 혹시 이뤄지지 않을까 긴장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쪽이든 그녀가 자신의 오랜 꿈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한지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나는 행정고시를 보고 사무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꿈이라기보단, 목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지만), 중학교 때는 외고를 가기 위해 우리 집에서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의 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원하던 외고를 갔더니 반 친구들 꿈이 (거의) 판사, 검사, 변호사, 외교관 아니면 의사였다. 나는 결국 수능성적에 맞춰 인문계를 들어갔고, 대학교 3학년이 되자 막연히 고시를 보겠다며 필수 과목이었던 제2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상하이로 날아갔던 것이다.
물론 늘 내 앞에 외교관이나 사무관 이라는 선택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방송PD가 하고 싶어 교내 방송국에 들어가기도 했다(일 년도 못채우고 나왔지만.) 2학년 때 꿈은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래 저래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행정고시로 돌아갔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던 것 처럼. 그러다가 승무원이라는 꿈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르는 그 친구를 나는 만났던 것이다.
어학연수 과정이 끝나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서울로, 그녀는 부산으로. 그녀는 승무원이 되기 위해 남은 학기들을 치열하게 준비했다. 그리고는 응시한 모든 승무원 면접들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어느 무역 회사에 들어갔다. 승무원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한 중국어 능력이 취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아주 가끔 그녀가 궁금하다. 10년 넘게 지켜온 꿈을 접어야 하는 마음은 어땠을까. 그녀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비행기를 탈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대학교 4학년, 신입 사원 면접을 준비할 때 학교 친구들과 스터디를 짜서 기출 문제들을 연습하고는 했다. 그 문제들 중 하나가 이거였다. "당신은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질문은 지금 생각해봐도 답을 모르겠다. 신입 사원이 일을 얼마나 해봤다고 10년 뒤 20년 뒤 뭘 하고 있을지 대답할 수 있을까? 그리고 A라는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 지원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이 "저는 이 회사의 마케팅 부서의 임원이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말고 뭐가 있을까? (물론 회사와 부서에 따라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답을 반기는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회사 면접관들은 아무래도 보수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한 회사를 10년 다닌 나는 그 동안 인사, 전략 기획, 사업 개발(제휴), 서비스 기획을 순서로 그래도 꽤 다양한 직무를 경험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10년 뒤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계속 글을 쓰는 회사원으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회사는 계속 다니고 싶긴 한데, 10년 뒤에는 인공 지능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대체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꿈이라는 건, 나에게 아직도 로망 같은 걸로 남아있다. 20년 뒤에 나는 여전히 회사원이고 싶고, 계속 글을 쓰고 있었으면 좋겠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든, 매일 충족감과 우수성을 느끼며 인정을 받고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소설이나 시를 쓰는 여유도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관심 갖고, 세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정도까지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막연한 꿈이다. 이 꿈을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1) 매일 충족감과 우수성을 느낄 수 있게 나의 '미시적인 동기'가 향하는 일을 찾기 2) 그 일을 찾은 후 세부적인 준비를 하기 정도일 것이다. 아직은 2번 단계까지도 가지 못한 상황이다.
어쩌면 이 때문에 『다크호스』라는 책이 나에게 크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막 휴직을 시작한 나에게 1번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 찾기'와 '그 일을 찾은 뒤에는 준비 방법 계획하기'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목적지를 무시하라'의 장의 내용을 아래에 발췌했다. 당장 20년 후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된다고. 지금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을 찾아, 지금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너무 조급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휴직 2달 차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목표는 당장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용할 만한 여러 가지 전략을 바로 당장 시도해볼 수 있다. 출판사의 마감일 전에 소설을 탈고하기, 다음 해에 판매 실적 높이기, 다음 번 축구 시합에서 승리하기 등은 다크호스형 사고방식에서는 모두가 타당한 목표다.
그에 반해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은 언제나 의존적이다. 중간에 발생하는 상황이나 불확실한 상황,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목적지에 가려면 다수의 미래 전략들이 필요하고, 이 미래 전략들은 중간에 개입되는 전략의 결과에 좌우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충족감을 달성하기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노벨 문학상 타기, 사내 최고 영업 사원 되기, 월드컵 승리는 모두가 목적지에 해당되는 사례다.
당신이 고등학생인데 하버드 법대 입학이 목적지라고 치자. 당신이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불확실한 상황과 중간에 발생하는 상황들이 너무 많으며, 목적지 자체도 전적으로 표준화 계약에서 정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목표들도 많다. 예를 들어 철학책 읽기, 다음 번 그룹 토론대회에서 이기기, 현지 로펌에 인턴 지원해보기 같은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물론 목적지를 지향하더라도 장차 하버드 법대에 입학할 가능성은 분명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는 목표들을 수행하면서 얻는 경험을 통해 자기이해를 하게 되면, 자신의 진정한 개개인성에 더 잘 맞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선택들이 눈앞에 펼쳐질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 입사 10년 만에 첫 휴직을 내자마자 다시 꺼내어 읽은 책,『다크호스- 토드 로즈, 오기 오가스』의 리뷰는 세 편으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1. 내 천직을 찾는 데 딱히 쓸모없는 질문 - 장점 말고 동기 찾기.
2. 누군가의 성공담 - 나는 그 사람처럼 숫자 감각이 없는데 서비스 기획 업무를 계속해도 괜찮을까? (해당 편)
3. 나는 20년 후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지 않다 (해당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