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 없는 삶

퇴사 권하는 여자6

by 호밀밭의 사기꾼

월급이 없는 삶을 상상해본다. 아니,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이 갑자기 끊긴 상황을 생각해본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그만 살아지는 것도 아니니 매월 나가야 하는 비용들은 그대로 나가는데 수입이 사라진다. 전기세, 가스비, 수도세, 보험료, 통신비, 적금, 월세는 월급이 들어오건 말건 저 혼자 나간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당연히 퇴사를 가로 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월급이 없는 삶이다. 갑자기 수입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끝도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갑자기 수입이 없어지는 상황을 대비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금을 들었다곤 하지만 적금 만기일이 나의 퇴사일을 맞춰주지 않는다. 오히려 도래하지 않은 만기일 때문에 월급은 없어도 적금은 나가야 한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야 하는 비혼 상태의 월세 생활자라면 이처럼 깝깝한 상황이 없다. 덜컥 겁이 난다.


퇴사를 결심한 사람들은 완전히 이 업계를 떠날 작정을 하기도,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할 생각을 하기도, 잠시 쉬었다가 천천히 새로운 직장을 알아볼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떤 계획이든 월급이 없는 삶을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퇴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회사에 다니자. 누구나 가슴에 사표 하나쯤은 품고 살지만 당장의 월급이 없는 삶에 대한 공포가 가슴에 품은 사표를 화석으로 만든다.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퇴사 이후의 삶은 당연히 퇴사 이전의 삶과 다르다. 달라진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첫 회사를 1년 정도 다니다가 대책없이 관둔 적이 있다.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은 돈을 버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지만 어쨌거나 수입이 0인 상태가 지속될 예정이었다. 1년 동안 그 쥐꼬리로 나는 많은 것들을 해결했었다. 공과금을 냈고,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친구들을 만나 밥과 술을 즐겼고, 무이자 할부로 카메라 같은 것을 샀고, 종종 영화를 보고 책도 샀고, 각종 경조사에 축의금과 부의금을 내며 적당히 사람 구실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퇴사와 함께 불가능해졌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지출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갑작스런 퇴사 이후 수입은 적지만 내 시간을 적게 뺏기고 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 하면서 3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그렇게 1년을 살았다. 한 달에 30만원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지 않다. 트위터에서 "그 돈으로 생활은 어떻게 해요?" "생활을 안 합니다"라는 웃픈 트윗을 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 나도 생활을 안 했다. 그 생활이란 보통의 사회인이 하는 거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외출을 최소화하고(나가면 어떻게든 돈이 든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문화생활을 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경조사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고 마른 반찬 몇 가지를 준비해놓고 집에서 삼시세끼 밥을 먹었다. 이게 사는 건가, 싶겠지만 나는 살 맛이 났다. 정신적인 스트레스 대신 조금 쪼들리는 삶을 택했고 나는 그것이 행복했다.


앞서 쓴 '퇴사 권하는 여자5: 이것은 자발적 퇴사가 아니다'에서 말했듯이, 대부분 정신력이 한계에 부딪쳤을 때 퇴사를 결심한다. 슬픈 이야기지만 마음의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질 않는다. 월급에 팔았던 영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월급을 반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내게 강 같은 평화'를 획득할 순간에 대비해야 한다.


언제든 사표를 던져도 당장 몇 달 정도는 마음을 다스리며 생활할 수 있게 조금씩이라도 생활비를 모아놓자. 퇴직금 받아서 야금야금 먹어버릴 생각 하지 말고, 그거야말로 만약에 있을 불행한 사태에 대비해 넣어두고 잠시나마 생활비로 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약간이라도 준비해놓자.(물론 월급을 쪼개서 보따리에 넣어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지만) 다양한 인맥을 만들어두는 것도 좋다. 기회는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불쑥 닥쳐오기도 한다. 보통 그 '생각지도 않던 곳'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퇴사를 결심했다면 본인의 퇴사 의지와 결정을 널리 알려 스스로를 이롭게 하자.


월급이 없는 삶에 대한 공포를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아쉬운 사람'이 된다.

물론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 '아쉬운 사람'들이다. 월급이 아쉽고 경력이 아쉽고 직급이 아쉽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처럼 살자. 언제든 이 회사를 나갈 수 있고 나는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많은 풍경들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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