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은 춘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학곡리에 있다. 빵집, 카페, 도서관, 은행, 꽃집, 약국이 하나씩 있는 작고 조용한 동네이다.
집에서 나오면 큰길로 나가는 길과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로 나뉜다. 평소에는 큰길 건너편에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본다. 큰길로 나가는 길 반대편으로 난 골목으로 걸어가면 또 좌우로 길이 나뉜다. 왼쪽 길은 가끔 달렸던 곳인데, 15분 정도 뛰면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커다란 도로가 나오면서 길이 끝난다. 오늘은 가본 적 없는 오른쪽의 작은 골목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길은 다섯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이었다. 30분 정도 걷는 동안 내 키의 열 배가 훨씬 넘는 나무를 자주 봤다. 커다란 나무 앞에 있으면 해변에 서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작고 보잘것없어지는 기분. 머리 아픈 고민이 사소해지는 기분. 자연 앞에서는 모든 생활과 분주함과 안정의 욕구가 부질없어진다. 그 감각이 좋아서 나는 바다로 산으로 간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작고 큰 밭들, 아직 초록빛을 띈 클로버, 색바랜 강아지풀, 물웅덩이, 멀리 보이는 산, 오래된 집, 새로 지어 깨끗하고 세련된 집, 잠 든 고양이, 커다란 까마귀 둥지, 낙엽이 잔뜩 쌓인 작은 언덕 같은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여름이 녹으며 남긴 찰진 열매가 가지마다 가득했다. 밭에는 배추가 묶여있기도 하고 감이 잔뜩 떨어져 있기도 했다. 마른 나무껍질과 오래된 나뭇잎 냄새 사이로 벌써 차가운 겨울 냄새가 났다. 소가 그립게 울고, 닭이 울었다. 집 지키는 개가 조용히 나를 쳐다봤다.
잎이 다 떨어진, 높은 은행나무 한 그루도 만났다. 언덕을 이루며 폭신하게 쌓인 은행잎은 회갈색으로 바래어가는 가을의 진통 속에서 홀로 빛났다. 그곳에는 해가 진 저녁, 불빛과 함께 새어 나오는 웃음처럼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자기만 한 거미줄을 걸고 있는 나무도 봤다. 어디부터 시작하는지 모를 크고 단단한 거미줄이 바람 따라 물렁하게 흔들렸다. 실수로 거미줄을 끊을까 봐 웅크리고 걸었다. 바짝 마른 넝쿨이 감긴 상아색 작은 나무도 있었다.
길에서 본 나무들의 이름이 궁금했다. 대추나무와 감나무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열매를 보고 나무의 이름을 안 것처럼, 나도 내가 맺는 열매로 이름을 갖고 싶었다.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어도 그걸 돈과 바꾸지 못하면 열매의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나무처럼 내가 맺는 열매의 이름을 갖고 싶다. 뜨거운 햇빛을 받고, 바람과 서리를 맞고 나뭇잎과 꽃을 피워내고 떨구기도 하면서. 어떤 날은 도토리처럼 작은 열매를, 어떤 날은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기도 하면서. 내가 맺은 신선한 열매로 나를 말하고 싶었다.
집 근처에 큰 나무와 거미줄과 소와 많은 밭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 낯선 길로 들어서자 가축과 까마귀와 잘 익은 열매와 눈부신 계절이 걸음마다 쏟아졌다. 전깃줄이나 높은 건물에 가려지는 것 하나 없이, 선홍빛 노을을 하늘 한가득 보는 호사로움이 가까이 있었다. 일상에서 멀리 떠난 여행지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두 번이나 모르고 지나친, 그러나 곧 다시 찾아올 학곡리의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