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발라톤

by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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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책에 집중한 알바가 아니었다면 무궁화호를 타고 있다 해도 믿을만한 승차감이다. (이 글이 처음이신 분을 위하자면 알바는 나와 함께 살았던 스페인 친구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했지만 민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차창밖을 봐도 그 녹음과 하늘은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델리역 플랫폼 안 빵가게가 떠올랐다. 뒤에서 빤히 쳐다만 보다 말았다. 배고프진 않겠지. 아무래도 첫 생활비를 정산도 하기 전이라 고작 빵 하나조차 조심스러웠다. 티허니에서 무엇을 먹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얼굴이 다 타도록 풍경만 보다 보니 끝도 없이 넓은 발라톤 호수가 보인다. 휴대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를 켰다. 셔터만 누르면 꼭 나무가 호수를 가린다.


여름이 끝나기 전, 우리는 헝가리 유명 휴양지인 발라톤 호수로 떠났다. 혹시나 싶어 알바와 줄리아에게 함께 가자 제안했고 스케줄이 비어있던 알바가 흔쾌히 합류했다. 헝가리의 바다라 불리며 중앙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 발라톤. 가장 크게 시오포크와 티허니 지역을 많이 방문한다. 시오포크는 호수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으며, 백조나 새들이 많이 보인다. 지금 가는 티허니는 라벤더가 유명한 마을로 축제 기간에 가면 더욱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


기차에서 내리니 또 호수가 사라졌다. 민의 지휘에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요금을 내기 위해 동전을 손에 꽉 쥐었다. 손에서 동전 냄새가 나 주머니에 쑤셔 넣으니 버스가 왔다.


루미큐브 할래?


버스에 앉자마자 눈을 마주친다. 민을 시작으로 알바와 나에게까지 퍼진 휴대폰 루미큐브 게임이다. 티허니로 향하는 기차를 예매할 때도 루미큐브 한 판을 끝낸 후였고, 기차에 타서도 루미큐브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스페인에서도, 한국에서도 통하는 루미큐브. 하지만 승부를 가르기도 전에 마을로 도착한 버스다. 이때는 버티고 버텨, 가장 나중에 게임을 빠져나간 사람이 코인을 얻는다. 보통 알바와 민은 쿨하게 게임을 나가고 나 혼자만 코인에 집착한다. 고로, 코인은 나의 것.


다들 목적지가 같은지 버스 뒷문으로 우르르 내린다. 퍼지는 라벤더 향기. 뜨거운 햇빛. 향기를 따라 자연스레 정류장 바로 앞 가게에 들어간다. 말린 라벤더. 라벤더 방향제. 라벤더 오일. 라벤더 비누. 라벤더 마그넷. 따뜻함이 가득 느껴지는 자연친화적 관광특구 유럽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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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내를 따라 들어가니 발라톤 호수가 펼쳐진 넓은 발코니 자리가 나온다. 다들 여기 있었군. 햇볕 아래가 북적이는 가게다. 메뉴판을 한참 보고서, 직원을 한참 기다리고서, 주문을 마치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요트들. 반짝이는 호수. 들리는 외국어. 좋다는 말이 숨 쉬듯 나온다.


남자친구가 있는 알바를 위해 민과 전날 밤부터 준비한 대화주제는 밸런스 게임이었다. 깻잎논쟁에서 깻잎대신 무엇을 예로 들어야 좋을까, 롱패딩을 안 입는데 어떤 게 적절할까. 민은 실전에 강하다. 막힘없이 열변을 토하며 알바가 고민하게 만든다. 알바가 생각할 동안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주고받는다.


내 앞으로 피자 한 판, 민 앞으로 피자 한 판, 알바 앞으로 요리 한 접시가 놓인다. 사이즈가 만만치 않지만,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피자를 열심히 가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내 한계를 뛰어넘은 날이었다. 피자 한 판을 다 먹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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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나서기 전, 화장실에서 찬물을 팔꿈치까지 적신다. 땀조차 증발할 것 같은 더위에 대비해야 한다. 가게에서 얻은 관광책자에 나온 전망대에 오른다. 연분홍의 장미들과 곳곳의 라벤더들이 이국적이다. 사진을 찍어드린 아저씨가 우리도 서보라고 했다. 원하던 답변이었다. 하지만 원하지 않은 결과물을 얻었다.


젤라또 가게에서 멈춰 섰다. 라벤더맛 젤라또도 있었던가.. 기억은 없지만 당연히 나는 레몬맛 젤라또를 먹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니면 항상 갈증이 가득하다. 텁텁한 맛을 더하고 싶지 않아, 항상 젤라또 가게에선 상큼한 레몬맛을 주문했다. 관광상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헝가리에서 유독 자주 본 것 같은데, 유리 공예가 관광상품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색색의 유리 꽃들을 지나가며 보았는데, 정말 사고 싶었다. 민은 라벤더 맥주를 두 병 샀는데, 언젠가 집에서 한 입 얻어 마신 기억이 있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한껏 여유로운 날이었다. 그냥 지나칠뻔한 주말을 선물처럼 보내게 해 준 결단력 있는 민에게 고마웠다. 함께해 줘 더욱 새로웠던 알바에게도 고마웠다. 그해 여름의 시작은 크로아티아 여행이었다면, 끝은 티허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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