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받아치기

by 지수


최악의 플랫메이트 자리를 차지한 마리아에 관하여.


지금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왜 자꾸 미드 '지니 앤 조지아'에 나오는 어린 조지아가 떠오르는 걸까. 매일 밤 파티에 가서는 새벽마다 달그락달그락, 시끄럽게도 열쇠를 구멍에 넣으며 귀가를 알렸다. 플랫 메이트 편에서 소개한 것처럼 초반에 스페인 친구들은 가족마냥 똘똘 뭉쳐있었다. 냉장고에 붙은 그들만의 규칙도 내가 영상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볼 일을 다 본 후 뻘쭘하게 나온 화장실 앞 소파에서 탄생한 것이다. 훗날 원수 같은 사이가 될 줄도 모르고.



뜻을 아신다면 부디 알려주세요



가장 나이 차가 적다는 이유로 그녀와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귀여운 청일점 네스토르의 축구경기를 구경하러 간 날. 대단한 경기를 관람하는 줄 알고 따라갔지만 그냥 동네 축구인 게 황당했다. 아직 서먹하게 친한 사이라 헤실헤실 따라간 것이 잘못이었다. 남자애들 축구공 차는 걸 왜 구경하고 있는 건지. 얘들은 알고 온 건지.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잘 보이지도 않는 펜스 안 네스토르를 찾아 헤매는 마리아, 줄리아, 알바, 민과 나였다. 하나둘씩 휴대폰을 보는 게 웃겼다. 마리아와 뒤편에 있는 놀이터 그네를 타러 갔다. 전공이 뭐냐,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 물어본 것 같다.


줄리아, 알바가 어리고 술을 잘 못 마셔 재미없다는 얘기는 어쩌다 나온 건지 모르겠다. 당시 줄리아와 알바는 파티도 안 좋아하고 술도 몇 번 거절했기에 나도 아기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더 공부해서 이 애기들 대신 마리아의 술친구가 되어 주겠노라 일기장에 적은 것 같았다. 잠깐의 대화에서 마리아의 공허함을 느꼈다. 친구 하나 없는 부다페스트가 싫다고 했다. 마음을 붙일 곳을 못 찾은 듯 보였다.


어떤 결정으로 헝가리까지 오게 된 건지 물어보려 했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아기를 위해 그네에서 내렸다. 그런 마음은 갖지 말라는 건지, 마리아는 한 번도 예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단단히 있었는지 줄리아와 알바도 마리아에게 냉랭해졌다. 어느 날은 스페인어로 줄리아와 대화를 하던 마리아가 한 마디를 빽 지르더니 현관문을 쾅 닫아버리며 나갔다. 와우. 그리고 물음표. 같이 있던 민과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다 웃어버리는 줄리아와 알바를 보고는 그들이 말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영어로 싸우지. 강 건너 불구경하던 내게도 불씨가 찾아왔다.




'얘들아, 수저랑 그릇이 하나도 없다'며 울먹이는 아이콘과 빈 수저통 사진을 함께 첨부한 글을 단체 문자방에 보낸 적이 있다. 학교를 다녀오고 나서 알바가 나를 불렀다. 내 문자에 대해 마리아가 네스토르에게 비아냥이 섞인 말을 주방에서 나눴다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알바가 따라 하는 말투에서 내 특유의 친절함이 보였다. 그 바보 같은 친절. 웃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미소. 한국말로 구시렁구시렁 민에게 욕하면서도 문자에는 친절을 앞세운 굽신거림이 있었다.


아, 내 친절이 이렇게 보였구나.


화끈거렸다. 황당하다는 듯 웃어넘겼지만 연신 되뇌었다. 유독 부다페스트에서 나는 화나 짜증에 솔직하지 못했다. 가면 쓴 것 마냥 웃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화낼 수 있어? 그럴 깡이 있어?


없다. 나는 화내는 것보다 웃는 게 쉬웠다. 한참 쉬웠다. 난 내 갈 길을 갔다. 더 방글방글 웃었다. 마리아에게는 퉁명스럽게 대하자 다짐은 했었다. 다음날 주방에서 마리아를 만났는데 반사적으로 미소를 발사했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집에 가다 싸웠는데 다음날 화장실에서 마주치자마자 싸웠던 건 까맣게 잊고 친하게 굴었던 기억이 났다. 습관은 쉽게 고치지 못한다.


그렇게 어영부영 마리아와의 마지막 날이 왔다. 약속이 있어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단지 공동현관을 닫고 대로변으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마리아와 네스토르를 마주쳤다. 생각보다 빠른 이별이었다. 거의 학기가 끝나자마자 떠났으니. 서로 '잘 가'하며 지나가면 됐는데, 그 0.0002초 정도의 어색함과 어떠한 움직임으로 인해 포옹을 하게 됐다.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맞대고 등을 토닥토닥. 마리아 그다음 네스토르. 그리고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집 현관 앞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민이 네스토르와 마리아가 갔다고 했다. 안 그래도 마주쳤다고 답하며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웃음만 나온다. 나만 웃긴 이 상황. 어쩌자고 포옹까지 하며 배웅한 건지. 그 얼떨떨하며 안기는 마리아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마지막을 지나쳤으면 어땠을까. 그저 집에 있다가 캐리어를 끌고 나가는 그들을 쳐다보았다면. 친구들과의 약속이 늦어져 마지막까지 마주치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그 못된 마리아와의 찝찝함만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많이 싫어했다! 생각해 보면 마리아도 너도 내 앞에선 아무 소리 못하고 웃기만 했다. 그 미소에 우리가 이렇게 온 거다. 너도 웃었고 나도 웃었으니. 미소의 힘은 길게 봐야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미운 것만 아니라 안쓰러웠던 때도 떠오르는 걸까. 물론, 집 관리자가 와서 마리아 방에 베인 담배냄새에 대해 물었을 때 바로 모든 걸 먼저 고자질한 나다. 벌금은 잘 냈니, 마리아? 나는 널 용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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