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딸, 이상형 혹은 웬수 그 중간 어디쯤.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는 남자, 30세의 딸이 회상하는 아빠 이야기

by 임현빈

엄마 편을 올렸더니 아빠가 섭섭할 것 같아 이번엔 아빠 이야기다.

사실 아빠는 신경도 안 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효녀인 척은 해야겠으니, 두 번째 가족 이야기를 꺼내본다.



우리 아빠는 7남매의 다섯째다.

아들로만 따져도 애매한 둘째 아들.

우리 아빠가 원조 샌드위치 아닌가 싶다.


지금 5~60대 세대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빠의 역할은 누구보다 많았다.

밖에서는 경찰 공무원이자, 7남매 중 가까이 사는 가장 기댈 만한 공무원 아들,

장인어른을 모시고 사는 사위, 그리고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

지금 세대였으면 저 중에 하나쯤은 슬쩍 눈감고 던져두었겠지만,

유교 보이인 아빠에겐 저 모든 건 그저 당연히 짊어질 숙제였기에

나도 나이가 조금 들고 이제서야 생각하니 저걸 다 어떻게 짊어졌나 싶어 신기할 뿐이다.


아빠는 이제 그중 하나 정도는 슬며시 내려둔 듯 보이지만,

술에 취할 때면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씩 꺼낸다.

아빠에게도 인생에서 처음 만난 사내였을 할아버지.

본인의 아버지인 할아버지가 늘 인생의 기준인 듯,

할아버지를 리워 하면서도 조금은 서운했던 날 이야기가 아빠의 고정 레퍼토리다.


아빠는 언젠가 진심인 듯 농담인 듯 내게 말했다.

사실 본인의 꿈은 "작가"였다고.

할아버지가 본인의 뒤를 이어 아빠에게 농사를 짓게 하겠다던 젊은 날의 선언을 피해

도망치듯 옆 동네로 고등학교 유학(?)을 감행하고 살다 보니 경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아빠를 꼭 닮은 내가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고등학생 때부터 다른 동네로 도망쳐 학교를 다니고 혼자 서울에 상경해 살고 있으니

피는 못 속인다.


"나름" 효자 아들인 아빠 덕분에 우리 엄마는 "강제"효녀 며느리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아빠는 남편으로는 딱 50점이라 나는 감히 평가해본다.

그래도 뭐.... 아빠로서는 80점은 되는 것 같다.

본인은 늘 양쪽 부모를 챙기느라 자식을 돌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데,

그 마음이 고마워 90점으로 올려주려다가도 가끔 엄마에게 하는 걸 보면 또 얄미워서 80점을 주련다.


아빠와 나는 보통의 부녀보다는 나름 친하다.

떨어져 산 덕일까, 아니면 수많은 역할을 짊어진 아빠가 어느 순간 이해가 되어서일까.

나는 지금도 아빠에게만큼은 이름을 부르며 철없는 딸로 살려고 한다.


누구를 만나든 저런 생활력 강한 아빠를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고,

적어도 부모에게 저만큼은 해야지 싶어진다.

나는 불안정하고 참을성 없을지언정,

내 옆사람은 저렇게 다 버티고 자신의 역할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버렸으니

아직까지 내가 시집 못 간(?) 이유는 아빠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본다.

단점의 기준도 아빠에게서 찾고 있다는 건 안 비밀이다.

이러니 딸 바보 아빠 밑에서 자란 딸들은 시집 잘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곧 아빠의 인생에 "퇴직"이라는 새로운 챕터가 다가오고 있는 만큼,

짐은 좀 내려두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되, 툴툴 대면서도 곁을 지켜준 엄마를 좀 보살피며

양관식씨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엄마와 "함께" 재미진 인생을 살기를 응원한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남자가 우리 아빠라서 기준이 나름 높아졌고,

아빠가 나름의 삐딱선을 타며 도전하며 산 것처럼

나도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야 속이 풀리는지

글도 쓰고, 대학원도 가고, 버킷리스트도 채우고 지워가며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름 아빠 탓이니 그것도 아빠가 책임져야 한다 생각하는 그런 철없는 딸이다.


공무원 퇴직이라는 아빠의 새 챕터가 시작되는 그날,

부디 "공무원인 다섯째 아들"이라는 무게는 내려두시고 "좋은 남편"의 무게만을 가진 아빠가 되기를 바란다.

뭐, 철없는 딸의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