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and NZ (11)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키장에 가는 날이다. 있는 집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스키 강습을 받았겠지만, 난 논밭을 얼려 만든 스케이트장에서 눈썰매와 스케이트를 배웠다. 그래서 이번 스노보드는 설레었다. 처음은 늘 설렌다. 강습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필요 없다고 말했다. '굳이 뭘 돈 내고 배우나... 타다 보면 알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돈 외의 것을 지불하게 된다. 강습은 꼭 필요했다.
이른 아침 짐을 챙겨 근처 쇼핑센터에 자전거를 타고 갔다. 스키장행 버스는 쇼핑센터에서 출발한다. 학교 친구들과 버스 안에서 인사하고는 바로 잠들었다. 지금이라면 '귀찮아, 보드 타러 안 갈래' 하겠지만, 그 시절 에너지가 넘쳤었다. 버스에서 바로 곯아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 시절 잠도 넘쳤었다.
행선지는 Mt. Hutt 스키장, 내가 살고 있는 Christchurch 시에서 4시간 정도 걸린다. 우리 버스는 한 시간 남짓 지나니 도심에서 벗어났다. 남섬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지만 한국에 비교하자면 작은 도시이다. 시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경기도 일산 정도의 도시를 지나니 끝없이 펼쳐진 풀밭이 도로 양쪽으로 펼쳐졌다. 뉴질랜드 인구보다 많다는 양 떼가 군데군데 모여 한가롭게 풀은 뜯고 있었다. 잡지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천국이구나!'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버스로 가고 있는데, 저 멀리 커다란 산이 하나 보였다. 작년에도 보드 타러 갔었다는 친구를 깨워 물었다.
"다 평지인데, 저기 보이는 산은 뭐냐?"
"저 산이 우리 목적지인 Mt. Hutt이야. 커다랗게 보이니까 가까워 보이지? 저 산으로 3시간은 달려야..."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 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30분 안에 도착 가능한 거리처럼 보이는데 3시간이 걸린다니.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하나도 없고, 공기도 깨끗하니 시야가 뻥 뚫렸다고 300km 밖의 산이 보이다니... 한참 버스가 달렸는데도 산은 크기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산은 산이고,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한 가지가 있었다. 버스 양쪽에 보이던 '천국의 양 떼'가 몇 시간째 계속 양 옆에서 저 멀리 꼬물꼬물 거리니 너무 지겨웠다. 마치 머리 위에 있는 비듬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풀밭이 머리고, 양 떼가 비듬이다!
종종 한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다.
"뉴질랜드는 평화로워서 천국 같네요."
"뉴질랜드는 안전하고 살기 좋네요."
한국과 다를 바 없다. 취향의 차이일 뿐, 한국이나 뉴질랜드나 똑같다. 인생의 진리 아닌가? 뭐든지 마음이 지어낼 뿐이다. 속지 마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뉴질랜드는 이민국가이다. 이민의 역사가 오래됐는데, 영연방에서 초반에 많이 이민을 왔다. 초반이라 하면 1960년대를 말하는데, 그 이민자들 중 한 명이 지금 가려고 하는 Mt. Hutt을 개발했다. 스키장 사무실을 만들고 스키 코스를 만들고 그리고 리프트는 그때 없었을 테니 수동 T-Bar 정도를 만들었으려나. 그리고 이 사람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다.
이민국에 남은 기록은 '건설 인부'로 등록이 되어 뉴질랜드에 입국을 하였는데, 사실 이 사람은 히틀러 친위대 대원 즉 나치였다. 전쟁범죄자로 더 이상 유럽에서는 살 수 없으니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나 보다. 하지만 전쟁범죄자임을 술 마시면서 떠들다 사라졌는데, 아마도 자신이 만든 Mt. Hutt과 영원히 있고 싶었나 싶다.
관광의 나라답게 Mt. Hutt 입구에는 사람이 참 많았다. 뉴질랜드 기준으로 많은 것이지 한국 기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준비하고 산 중턱으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니 오전 10시였다.
"자 이제 타고 내려가면 돼, 저기 Base camp에서 만나자"
이렇게 얘기하고 친구는 쌩 하고 내려갔다. 나는 굴러서 내려가기 때문에 점심시간이나 돼서 Base camp에 도착했다. 내려오는 동안 몇 번 심하게 넘어졌다. 하마터면 내 몸이 반으로 접히는 줄 알았다. 또 한 번은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한쪽 엉덩이가 먼저 땅에 떨어지면서 밀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항문 기준으로 찢어져서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처음 배우시는 분들은 꼭 강습 1회 받으시길 바란다.
오후쯤 되니 자신감이 생겼는지, 친구한테 산 정상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위험하긴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산 정상을 꼭 보고 싶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산 정상에 가다니.
리프트를 중간에 갈아타고 산 정상에 도착했다. 주변의 평지를 내려다보며 경치를 즐기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구석에 숨어 눈보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저 멀리 사람 한 명이 보였다. 까만 옷에 긴 막대기를 지닌 아저씨. 스키 타는 아저씨가 스키 폴대로 땅을 짚으며 오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막대기를 눈 바닥을 찌르면서 뭔가를 찾는 듯 보였다. 눈보라로 잘 보이진 않았는데, 검은 군복. 나치 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