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2일차
버스를 탄다.
친정집에서 안양 평촌까지는 자가용으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골목골목을 누비는 버스 노선인지라 아무리 성질급한 기사님을 만나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의 낮잠은 꿀 같지만, 시차 적응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시린 눈을 치켜뜨고 꾹 참는다.
출산 한 달 만에 직장에 복귀하며, 유축기를 담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매일 새벽마다 앉았던 자리, 시장에 들러 녹두빈대떡을 사서 친정 가는 길에 앉았던 자리, 방과 후 혼자 있을 손자를 위해 오가던 엄마가 앉았던 자리... 버스는 그날들을 하루씩 하루씩 불러온다. 그사이 도착이다.
떡집, 반찬가게, 식빵 전문점… 일이 끝나면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길에 들렀던 가게들, 감자탕집, 지하 노래주점에서 쿵쿵 올라오는 베이스 소리에 잠들던 건물, 뚱땅거리는 피아노 소리와 세탁소 스팀 냄새가 간헐적으로 올라오던 건물, 별보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사람들 눈이 더 잘 보였던 고층아파트로 둘러쌓인 3층짜리 연립을 지나간다. 이 건물 3층에 살며 옥상을 함께 사용했었다. 마당이 그리웠던 남편을 위해 어렵게 찾아낸 집이었고, 사는 동안 머리 위 마당있음에 행복했었던 곳이다.
미국에 이민간지 10년된 어떤 이가 그랬다. 미국 정착의 성공비결은 10년간 한국에 한번도 안 간거라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이 공기, 이 기분, 이 편리함을 잊고 살면, 한국에 비해 느리고 낯설고 불편한 것 많은 미국살이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말로 이해한다.
친구가 운영하는 영어학원 앞에 도착했다. 아직 도착 전인 그녀를 기다리며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월요일이지만 성업 중인 브런치 카페가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낮에 여유롭게 둘러앉은 그녀들을 부러워하던 마음은 여전하다. 마음도 습관이다. 나도 지금 월요일 낮에 어슬렁거리고 있으면서 말이다.
최근 건강검진 결과에 걱정이 많다던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진심 김밥이 먹고 싶다는 나에게 더 맛있는 걸 말해보라며 밝게 웃는다. 참 정답다. 몇 년 전 지금 하는 일, 지금 있는 곳이 버겁고 지겹고 힘들다며 엉덩이를 들썩이던 그녀는 이제 다 내려놓았단다. 지금의 상태에 만족한단다. 누구에게나 엉덩이를 들썩이는 시기는 오고, 또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기는 지나간다.
오삼불고기와 커피 한 잔에 곁들어진 이야기들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눈을 마주치고 무릎을 마주치는 시간으로 충분하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미리 약속을 잡아둔 미용실로 향한다. 왕래가 10년은 넘은 단골 미용실이다. 단골이라기엔 지난 4년간 한국에 올때만 들릴 뿐이지만, 그 동안에도 다른 곳은 가지 않았으니 단골이라 해도 되겠지? 가만 보면 나는 같은 영화를 또 보고 또 보는 아들과 성향이 닮았다. 한 번 마음에 들면 딱 거기만 간다. 새로운 곳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일을 쉬이 도모하지 않는다. 도전을 외친 게 열 번이라면 실제로 한 건 하나나 될까?
그래서 ‘과감하게!’를 외치며 화려한 염색을 고민해도 결국 선택은 매번 핑크다.
아무리 머리에 생난리를 쳐도 도무지 날라리스러워지지 않으니, 이번엔 진짜 과감히 탈색하고 권지용급 핑크를 부탁한다. 장장 여섯 시간, 수다 떨다 목이 칼칼해질 무렵, 실내에선 티가 잘 나지 않지만 햇살 좋은 날 야외에선 반짝일 핑크가 완성됐다.
사탕봉지에서 사탕 하나를 빼먹고 남은 사탕 숫자를 세며 초조해하는 내 마음,
한국방문 일정 중 하루가 지나갔다. 또 하루 지나갔다. 또...또... 하루...
해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찾아오는 마음이다.
마음은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