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치

방한 4일 차

by MoonA

지난 겨울, 급히 Urgent Care를 가야 할 일이 있었다. 두어 달 간격으로 부어올라 말썽이던 잇몸이 참을 수없을 만큼 아파서였다. 급한대로 항생제를 처방받아먹으니 좀 나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들리는 치과, 오늘 가니, 그때 항생제로 잠시 잠재웠던 염증에 이를 지탱했던 뼈가 다 녹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발치를 결정하고 임플란트 상담을 받았다. 작년에 여기서 검진받을 때도 별 문제 안 보인다고 했었는데...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상담사는 방긋 웃는 얼굴로 무시무시한 견적과 무시무시한 치료기간과 무시무시한 경고를 내 앞에 쏟아낸다. 잠깐. 이 얼굴을 내가 어디에서 봤더라? 공포 영화 'Smile' 포스터였나?

견적서를 집어 들고 나오며 이 빠진 빈 자리를 혀로 스윽 문질러본다. 꼭 잡고 있던 뼈가 자기를 놓아버린 것도 서러운데, 나조차 너를 너무 무심히 그냥 놓고 나왔나 싶어 아차 한다.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가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한 말처럼, 오늘 아침의 나와 이를 하나 잃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 아닌가. 너가 있던 나와 너가 없는 나는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발치 후 마취의 여운이 남은 한쪽 얼굴이 거울에는 보이는데 만지면 내 얼굴이 아닌듯하다. 하지만 약속한대로 오늘은 내가 같이 가야 거기까지 나설 용기를 내어보신다고 하시는 부모님과 함께 명동 칼국수가는 길을 나선다. 한국 올 때마다 함께 온 것이 3번째가 되니, 이젠 버스에서 내려서 복잡한 골목 안으로 두 분이 앞장서 가신다. 정신없는 식당 내부에서도 익숙하게 줄을 서고, 익숙하게 입장한다. 우리는 주문한 음식을 바닥까지 남김없이 싹싹 비워낸다. 그 사이 마취도 다 풀렸다. 온 얼굴로 웃는게 가능해졌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명동성당으로 향한다. 오늘은 미사가 없는 성당 안에도 들어가본다. 구석구석 샅샅이 다녀보는 아빠, 비탈길 올라오느라 아픈 다리를 쉬어가는 엄마, 그리고 그들의 뒤통수를 열심히 사진에 담는 내가 미사장에 흩어져 있다. 할 수 있는 말, 할 수 없는 말, 해야만 하는 말들을 거르고 분류하다 지쳐 선택한 침묵이, 이 안에서는 다 읽히는 느낌이다.


세찬 봄바람을 뚫고 달리는 버스로 우리는 동네어귀에 도착한다. 당일 목표치의 걸음수를 채우지 못했으니, 둑방길 걷다가 가자하시는 아빠를 따라 밖에서 조금 더 있다 들어가기로 한다. 둑방길을 따라 늘어선 벚꽃나무들에는 곧 터질 듯 가득찬 망울들이 올망졸망하다. 벤치에 앉아 뉴스를 듣는 어떤이를 통해 건조해진 봄공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지리산 일대가 화마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접한다. 나의 일상과 세상의 일상이 얽혀서 마냥 웃지도 마냥 울지만도 못하는 하루하루, 참 많이 다른 세대의 부모님과 내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방법을 권하고 듣는 시간, 험한 시간 다 지났으니 이제 심각한 뉴스는 그만 보시라는 딸의 조언과, 살아보니 다 부질없더라며 뉴스 그만보라는 부모의 조언이, 둑방길 걷다 커피트럭에서 나눠 마시는 떫은 커피맛과 닮았다.


해야만 할 일과, 하면 안될 일과,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구별하며 사느라 고생한 우리, 오늘 나로부터 탈출한 그 이는 적어도 평생 해야만 하는 일이었던 저작의 노동으로부터는 벗어났겠구나하며 다시 휑한 자리를 스윽 훓어본다. 이 자리를 얼른 채우지 않으면, 아래에서 옆에서 그 자리를 노린다고 방실거리며 경고하던 오늘 아침 그녀의 얼굴이 한동안은 아른거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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