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방문 5일차

by MoonA

아침을 먹고 둑방길로 나선다. 아파트 뒷쪽으로 나가면, 오래된 단지가 아니면 보기 힘든 우거진 들꽃숲(?)이 있다. 여긴 아직 경비원 아저씨들이 각 동마다 계시는데, 정원가꾸기에 진심인 분들이 계신 곳은 금새 알아챌 만한 정성이 보이기도 한다.


그 길을 따라 나오면 이쁘게 잘 지어진 시립도서관이 나온다. 내가 학교다닐 때는 없었는데, 친정집을 떠난 후 생겼다. 만약 학창시절에 이런 도서관이 있었다면 문턱이 닳도록 왕래했을 것이다. 나는 책냄새와 책을 넘기는 소리가 가득한 곳은 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외부에는 각종 문화행사들을 안내하는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그 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자서전쓰기 수업. 수강대상은 만 50세 이상.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있다 부모님께 권해봐야겠다.


도서관을 지나면, 가나다라마바사... 한글 순으로 단지내 상가가 지어질 때, '사'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아주 아주 오래된 상가가 나온다. 초등학교 사거리 바로 앞으로 보이는 자전거 가게는 여전히 성업중이며 그 옆으로 고즈넉한 커피가게도 장사가 될까 싶은데 올 때마다 없어지지 않고 영업중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수퍼마켓, 반찬가게, 칼국수집, 무인 아이스크림점, 세탁소, 그리고 미용실 정도가 남아있지만, 내가 어릴 땐 서점도 있었다. 당시 여유롭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은 책 좋아하는 나를 위해 전집을 여러 차례 사주셨다. 그 중 세계 창작 동화 전집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건, 그 시절 읽었던 책들 중에 스무살 서른살 넘도록 살면서도 도움이 되는 책은 창작 동화라는 점, 학습백과전집보다도 훨씬 더.


조금 더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목표하는 걸음수를 채우려면.

상가를 지나 둑방길로 나가는 구름다리가 보인다. 출근하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 답답해 집을 나온 사람들... 표정만 봐도 알겠는 오늘의 기분들이 구름다리 위를 넘어가고 있다. 오늘의 미세먼지를 표시하는 표지판엔 양호라고 씌여있다.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걸으면,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알려져있는 기형도 시인의 시들이 곳곳에 씌여 있다.

'엄마 생각'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다리를 건너가면 가산디지털 단지쪽 둑방길이다. 거기엔 오랜 벚꽃나무들이 있어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가 되면 황홀한 벚꽃쇼가 연출된다. 6년 만에 보게 될 이 벚꽃길을 나도 오매불망 손모아 기다리는 중이다. 이 길을 걸을 땐,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부럽지가 않다. 거기도 뭐 결국 동네 공원아니겠는가.


얼추 걸음수를 채워가는 사이, 크게 한바퀴 돌아 다시 '사'상가에 다다른다. 오늘 점심은 상가 안에 있는 옛날 칼국수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기로 했다. 허름한 상가 내부에 구역이 테이블 몇개와 주방 공간이 다 보이는 식당이다. 문도 벽도 따로 없다. 상가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인다. 주방과 식사공간을 구분하는 파티션에 붙어있는 알림에 눈이 간다.

영업시간- 오전 11:00 ~ 오후 3:00
토일 영업안함

5개쯤 되는 테이블이 손님들로 만원이고, 칼국수와 보리비빔밥을 시키고 잠시 기다리자, 윤기 좌르르 흐르는 열무김치를 비롯한 엄마가 아침마다 정성껏 싸 주셨던 도시락에서 봤을 법한 정갈한 반찬들이 앞에 놓인다. 이 동네를 그냥 지나가는 이들은 절대 모를, 로컬들의 숨겨진 맛집이다. 우리가 있는 동안 주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얼굴들이 바삐 교체된다.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점심먹으러 다녀가는 맛집인 것 같다. 그들의 식사시간은 20분을 채 넘지 못하지만 남은 음식이 보이는 그릇은 없다. 옛날 어른들이 영업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등이 휘도록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나로써는, 이 식당 주인분들의 영업시간이 참으로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요즘 힙한 식당들의 영업시간이 이러하다고는 들은바가 있지만 이렇게 허름한 상가의 식당도 이렇게 힙한 영업시간을 가지고 있다니. 내가 미국까지 가서야 실현할 수 있었던 꿈의 노동시간을 실현하고 있는 이 분들을 보니, 태평양을 건널 것 있었나 싶기도 하고, 씹히는 보리밥알이 달기도 쌉쌀하기도 하다.


바로 옆에 있는 무인 아이스크림점에서 캔디바, 비비빅, 붕어싸만코를 사와서 부모님과 하나씩 나누어들고, 도서관 앞 벤치에 앉는다. 이럴 땐 인생 뭐있나 싶다. 줌으로 보던 얼굴들을 한뼘 앞에서 보면서 칼국수 한그릇과 캔디바에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소소한 시간을 뒤로 하고, 서울에 볼일이 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챙겨왔던 패딩조끼를 여며입고 지하철을 탔다. 미국에 있는 동안 꼭 빚진 것 같은 마음으로 영상으로만 지켜보던 안국역에서 예정된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저녁이 되니 바람이 제법 강하다. 3월 말의 바람만으로도 콧물이 르는데, 지난 겨울을 길에서 보낸 이들은 이걸 도대체 어찌 해냈단 건지 새삼 존경의 마음이 든다. 아스팔트 도로 맨바닥에 잠시 앉아 있으려니 집회 진행을 돕는 분들이 폭신한 1인용방석과 피켓을 나누어 주신다. 그리고 옆에 앉아계신 분이 연거푸 주머니에서 초코렛을 꺼내 나누어주신다. 대한민국 집회문화, 진짜 세계 1등이지 않을까 싶다. 초코렛이 맛있어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이후로부터 약 5시간 정도가 지나 집회일정이 마무리되고, 질서정연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귀가한다. 이제야 빚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느낌이다. 이내 나의 일상과 세상의 일상이 얼추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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