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방문 7일차

by MoonA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어떤 인연이 성립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때와 조건이 무르익은 시점’을 말한다.


시절인연, 그녀들을 만난다.


한 뼘 거리에 살면서도 한국에선 서로 알지 못했던 우리가,
대한민국의 약 100배 크기인 미국에서 이웃이 되었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우리는 낯선 시간과 공간을 책을 읽으며 함께 채워나갔다.

미국에 오게 된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같았다.
그 마음으로 우리는 매주 한 번, 영어 원서 독서 모임을 가졌다.




하루 종일 쌀쌀한 바람과 비, 그리고 눈이 오락가락하겠다는 일기예보를 본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반팔이 어색하지 않았는데,
급격히 낮아진 기온과 세찬 바람에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막막하다.
반팔과 긴팔 티셔츠를 겹쳐 입고, 가져온 청바지 중 가장 헤지지 않은 것을 골라 입는다.

혜화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오자 눈발이 날린다.
마로니에 공원, 초봄의 눈, 비둘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어폰에서 들리는 노래를 바꾸고,
운동화와 청바지 끝단 사이 약 1cm 드러난 발목이 시려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주문한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을 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 좋게 자리를 찾는다.

잠시 후, 러닝화에 귀여운 크롭 검정 패딩을 무심한듯 걸친 M이 도착하고,
10분쯤 뒤엔 부산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올라온
우리 중 가장 어린, 에너지 넘치는 S가 도착한다.

곧 다가올 헤어질 순간이 동시에 머릿 속에 그려진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일은 여전히 이만큼 어렵다.
내 생각이 멀리 가 있는 사이,
그녀들은 '김치찌게'와 '치즈계란말이'가 맛나다는 ‘엄마 밥상’이라는 백반집을 찾아낸다.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밥상 위에 소금처럼, 후추처럼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얹어진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이화벽화마을로 향한다.
M은 지도를 정말 잘 본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끝만 따라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번엔 그녀에게만 부담주지않고 내가 길을 검색하리라 다짐해도,
그녀의 손끝이 현란하게 폰 위를 오가면 나는 또 넋을 놓는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지”라며

책을 함께 읽으며 알게 된 과하게 힘이 들어간 내 어깨를 다시 상기시켜준다.


건물과 건물 사이, 계단과 계단 사이로 부는 바람에
반양말 위로 드러난 발목이 시린다.
벽화와 오래된 집, 식당, 커피집 사이를 지나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서울의 아기자기한 매력을 음미한다.

성벽을 따라 낙산공원으로, 다시 마로니에 공원으로,
서울대병원을 지나 창경궁에 도착한다.

그녀들은 입장하며, 최근 함께 읽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의 고궁 안에 하얀 서양식 온실.
일제가 창경궁의 품격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근대성과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동물원 겸 식물원으로 만든 곳.
전쟁을 거치며 훼손되었다가 복원된 그 장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년 여름, 부모님과 함께
모기가 창궐한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두리번거리며 사진만 찍고 돌아왔던 나 같은 사람도 있고,
그 공간에서 소설을 창작해내는 이도 있는 세상.
그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익선동으로,
집회 인파로 가득한 길을 따라 인사동으로 간다.
막걸리 한 잔에 파전을 곁들여, 이어지는 이야기들.

국어 선생님인 M, 청소년 상담사인 S, 그리고 평생 초등 영어를 가르치다 미국에 온 나.
자연스레 교육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우리의 아이들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느라,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없이 살던 시절을 지나,
‘내 길은 내가 만든다’는 마음을 다지며 엄마로서의 삶 또한 열심히 살아내는 우리를 위해,

지화자를 외쳐본다.


그리고는, 쨍쨍한 햇살 아래, 봄 한가운데 내렸던 눈을 바라보며 설레던 만남때 이미 머리 속에 그렸던, 다음을 얘기하는 헤어짐의 시간을 맞이한다.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끝은 있다. 그래서 인생이 살만하기도, 살만하지 않기도 하다.




발목을 붙잡고 나를 힘껏 아래로 끌어내리는 일들이

하나둘 늘어 무게에 못이기고 바닥까지 내려가면
하늘을 나는 꿈은 고사하고, 숨쉴 수 있는 수면 위로 올라가는 데에만 집중하게 된다.

다리에 쥐가 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이러다 죽는 건가’ 싶은 순간들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간신히 물 위로 떠오르면, 그래서 좀 숨이 쉬어지면,
그제야 외로움을 눈치채게 된다.


옷장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외로움을 견뎠다는
콘서트에서 했던 어느 가수의 말처럼,
친구 없이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아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

혼자되는게 두려운 나, 자신을 보았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도,

여럿도 다 괜찮다 할만큼,

메뉴얼없는 인생이란 기관차 운전이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을 돌면 마주치는 시절인연들,
오늘의 그녀들 덕분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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