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방문 10일차

by MoonA
영화 '28년 후'를 보다보면
다소 생뚱맞다 싶은 시점에
이 말이 나온다.
Memento mori.
당신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으며, 특히 승전한 장군에게 노예가 속삭였다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4월의 시작이다.

벚꽃을 기다리다, 눈꽃을 보았기에, 벚꽃은 이번에 더디 오려나 조바심이 났는데, 통통하게 차올라있는 꽃봉오리들을 보니 걱정할 것 없겠다 싶다. 눈이야 오든지 말든지 나는 내 갈길을 간다는, 끝내 봄을 데리고 오고야 말겠다는 뚝심이 느껴진다. 보송보송한 솜털조차 비장해 보인다.


오늘 아침엔 일찍 길을 나서 서울역으로 향한다. 지난 주말, M과 S와 함께 걸었던 길 중에 서울역 앞 버스 환승 센터에서 출발해 남산을 올라가는 그 오르막길이 좋았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느라 내가 그 길을 기억할까 의심이 들었지만, 끝의 기억력을 믿었보기로 한다. 한 켤레 만원이 넘는다며 힐끗거렸던 양말집 앞 건널목을 건너서 위로 올라간다. 처음엔 끝이 없는듯 까마득하지만, 그럴리없음을 언제나 증명하는, 남산타워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오른다. 입고 온 겹겹의 티셔츠들을 하나씩 허리춤에 묶는다. 그렇게 달랑 반팔 한 장이 남았을 즈음,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남산타워 아래에 도착한다.


조금의 틈만 생기면 올라오는 생각들, 눌러놓았던 생각들이 탁 트인 시야들 사이로 올라온다. 제일 먼저 올라온 생각.


자식도 부모도 한 뼘 거리쯤에 두고 부모노릇, 자식 노릇 다 쉬이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쪽에 가까워지면, 한쪽은 멀어지고,
한쪽에 멀어지면 또 한쪽엔 가까워진다.
그나저나 이러고 아둥바둥하는 나는 누가 챙기나.


생각이 이만치 이르렀을 때, 점점 늘어가는 사람들 소리에 집중이 흐트러진다.


생각의 매듭짓기를 미루고 미루다 지나가버린 시간들 같은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건반을 밟으면 올라오는 소리들처럼, 생각들이 또다시 올라온다.

배가 고프다. 예전엔 혼자서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을 만큼 용감했는데 이젠 혼자 서서 어묵을 먹는 것도 쭈뼛거릴 만큼 쭈그러진 풍선 같네, 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해. 메멘토 모리. 내일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 나를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울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하는 건지 아직 모르네.
서울역 삼송빵집에서 빵을 좀 사가야겠구나. 아빠가 좋아하시겠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혹시 이들은 알까?
메멘토 모리를.
모두들 별일 없으시죠?
두루 평안하시길요.

혼자 걷거나

혼자 버스를 타거나

혼자 책을 읽으면

나는, 남들이 알듯,

밝고 명랑하고 말 많은 사람이 아니 된다.

혼자일 땐 주로,

우울함을 즐긴다.

문득,

그게 나를 챙기는 방법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삐 점심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와 빵 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딸의 이른 귀가를 좋아하시는 아빠얼굴을 마주하며 생각들은 잠시 사라진다.


엄마는, 아빠는 당신들을 스스로 어떻게 챙기는 것인지 아실까?


화장실에서 잠시 고요해진 사이 생각은 다시 올라온다.








이전 06화시절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