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_Chaos

방한 17일차

by MoonA
카오스 (Chaos) 란
규칙이 있는 무질서.


7호선 내방역 8번 출구로 나와 위로 쭉 올라가다 보면, “여기에 도서관이 있긴 있을까?” 싶을 즈음, 도서관이 하나 나타난다. 2023년에 문을 연 신생 도서관, 서초방배 숲속 환경도서관이다. 요즘 한국에는 이렇게 새로 생기는 도서관이 많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이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는 일은 묘한 안도감을 준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이 조금은 덜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평일 오전임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만 알고 많이들 모를거란 기대는 기대로 끝났다. 원형으로 뚫린 건물의 중앙은 잔디가 있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그 둘레를 따라 둥글게 배치된 책상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번을 빙빙 돌아보아도 내 자리는 없었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테이블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요즘 카피라이터가 쓴 책들을 읽고 있다. 어릴 때부터 늘 글을 써왔다. 학교 숙제로 쓰던 일기, 주말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서너 개씩 빌려 본 영화 감상문, 끊임없이 이어졌던 짝사랑 편지들, 문학회 활동을 하며 참여했던 백일장, 장학금이 걸려 있던 수기 공모, 동아리방을 드나들때마다 끄적거리던 비망록, 육아일기, 학원을 운영하며 썼던 업무일기, 학부모 안내문, 아이들 성적표 등등등, 쓰고 읽는 일을 늘 즐겨왔지만,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혹은 어떤 글을 잘 쓰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 카피라이터 관련 책들을 읽으며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의 방식이 카피라이터식 작법이라는 것을.


오후엔 M선생님을 만난다.

2014년이었다. 그분을 만나 ‘우리들의 숨쉬는 터전_우숨터’라는 모임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게.

그 무렵 나는, 고급 육아를 지향하였지만 현실은 오븐장갑도 없이 뜨거운 빵틀을 꺼내던 서툴기 짝이 없는 엄마였다. 그때 만난 분이 M 선생님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나처럼 빵은 고급지게 구워내고 싶으나, 오븐장갑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엄마들과 늘 함께했다. 꾸준히, 흔들림 없이.

M 선생님 역시도 세 자녀의 엄마이다. 그래서일까, 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서두르거나 조급함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다.

엘렌 케이의 『어린이의 세기』라는 책을 읽으며, 작고 얇았지만, 담긴 이야기는 너무 커서 소화하기 힘들었던 날들, 세월호 참사와 신해철의 죽음을 담은 기사들을 함께 읽고 슬퍼했던 날들, 인문학 책을 펼쳐 놓고, 매주 모여 디베이트 전문가 과정을 함께 하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다시 그녀를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은 지금의 이야기이지만, 그 시간들의 우리가 동시에 소환되는 마술을 경험한다.

쉼없이 헛갈리고, 끊임없이 망설이고, 코 앞에 닥쳐서야 할 수 있었던 그때의 선택들이 꽤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왔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도서관에서 슬쩍 넘겨봤던 책에서 로지스틱 맵이라는 수학 모델을 설명했다.

현재의 값에 성장률을 곱하고, 남은 여유를 곱하면 다음 세대의 값이 나온다는, 얼핏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이었다. 아마 본격적으로 붙들고 앉아도 호락호락 이해할 수 있는 공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지극히 단순한 규칙이라고 말한다. 일단 그렇다고 치고.


이 규칙은 λ(람다)라는 매개변수 값이 일정 숫자 (3.57)을 넘는 순간, 예측 불가능한 혼돈(Chaos)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과 내일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도, 몇 세대 뒤에는 전혀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한다.


관계가, 사회가, 혹은 한 사람의 인생이 특별한 외부 원인 없이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매우 이성적이라 스스로를 일컫는 이들도 점술가를 찾는다. 운명을 믿어서라기보다, 의도치 않게 도출된 결과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고 위로를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한 혼돈 (Chaos) 이 무작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내가 매 순간 내린 선택이 쌓여 만들어낸 규칙의 결과물이라면 그 또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불안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수학 공식이 이렇게 삶을 말하다니, 나는 그동안 무슨 수학을 공부해온 것일까.

하기야 어린 시절, 우리들의 수학선생님이 주려고 아무리 애써도 줄 수 없었던 깨우침일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우리는, '예를 들어'라고 시작할만한 삶의 이야기가 매우 빈약했었으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 찾는 장소, 그것들을 행하는 시간, 모두가 지금 이 순간에도 혼돈(Chaos)의 규칙 속에서 날개짓을 한다. 그래서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 그리고 M 선생님과의 오늘의 대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기대하게 한다. 지금의 날개짓이 만들어낼 미래의 어떤 혼돈(chaos)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옆에 앉은 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어깨를 으쓱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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