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19일차
Limit
미적분에서 'limit'는 '한계'라는 뜻이 아니다. '목표_Target'라는 뜻에 더 가깝다.
목표에 실제로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가까워지기만 하면 된다.
수학성적이 제법 괜찮았다. 고등학교때 미적분에서 'limit'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글거리고 꼬부랑거리는 기호들의 뜻을 오해하고 왜곡하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나는 수포자가 되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아들이 기계공학을 전공 중이다.
이 말은 내가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이상의 시 '오감도'처럼 느꼈던 수학 기호들이 매일 그의 컴퓨터 모니터에 등장한다는 뜻이다. 실은 그의 지난 학기 미적분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재수강중이다.
아들의 전공선택이 반가웠다. 「문과 남자 이과 공부」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유시민 작가가 말했듯, 나도 아들이 이과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또다른 눈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제법 고상한 의미를 실어보았다. 하지만 그 고상한 의도는 잊힐 만하면 돌아오는 등록금 고지서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천박한 보상심리를 드러냈고, 미적분을 재수강하게 되었다는 소식에는 과거 수포자였던 내가 떠올라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이기는 장사는 없기에, 그 천박한 보상심리의 파도와 불안이 잔잔해지자,
잘할 수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공공부가 재미있다는 아들의 말이 들렸다.
도달하던 못하던 일단 가까이 가는 것이 목표인 20대의 그와,
닿을 수 없다면 가 볼만한 가치가 없다 여겼던 20대의 내가 마주보고 있었다.
훌쩍 나이든 나도 함께.
그리고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20대의 아들을 응원하기로 한다.
벚꽃이 만개했다.
지난 주말 동해에서 만발한 벚꽃을 보고 오기는 했지만, 친정 동네 둑방길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비할 데 없이 장관이다.
부모님과 함께 벚꽃을 보기 위해 둑방길로 나섰다. 건너편 가산 디지털 단지에서 점심시간을 만난 직장인들이 김밥을 비롯한 다양한 점심거리를 들고 삼삼오오 벚꽃아래 모여 앉아 있다.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군밤을 파는 아저씨도 나와있고, 솜사탕을 돌리는 아주머니도 나와있다.
모두가 만개한 수만송이 벚꽃무게에 휘어진 나뭇가지를 하나씩 붙들고 사진을 찍는 동안, 엄마는 잔뜩 수그린 자세로 뭔가를 뜯기 시작하셨다.
아고, 요 쑥 보드랍다. 좀 뜯어가서 쑥버무리해먹으면 맛있겠는데.
예상치 못했던 수확활동에 미처 도구를 준비하지 못해, 엄마의 손끝이 흙빛으로 물들고, 얇은 자켓 주머니가 쑥으로 봉긋 솟아오른다. 양쪽 주머니가 그득해질 즈음에서야 엄마가 허리를 편다.
이만큼하면, 한때 실컷 먹지 싶다.
그 뒤로도 우리는 하룻밤사이라도 비바람에 사라지고 없을 벚꽃을 기억에 담느라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커다란 징검다리가 놓인 개천을 건너간다. 한번에 하나씩, 쉬었다 넘어가고 쉬었다 넘어간다. 쑥을 뜯느라 허리를 오래 숙였던 탓에 엄마가 허리가 아프다 하니, 아빠는 잠깐 앉았다 가자 하신다. 부모님이 앉아 계신 벤치 위, 구름다리 너머로 노을이 진다. 벚꽃과 노을이다. 종일 행복이 저물지 않도록 넘어가는 해도 거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 어디론가 향하고, 그 시간의 끝이 목적지에 닿아간다는 느낌이 문득 든다.
숫자들을 무한히 더하면 하나의 결과에 수렴하기도 하고,
1+1/2+1/4+1/8+...=2
발산하기도 한다.
1+1+1+1+⋯=∞
부모님은 수렴해가는 시기를 지나고 있고,
아들은 발산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나의 지금은 수렴의 시기일까? 발산의 시기일까?
20대의 나를 바라보던 부모님의 마음을 자주 떠올려본다.
그러면 20대의 아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게 옳을지 답을 찾을 수 있을 때가 제법 있다.
Limit, 즉 Target에 닿을 것을 바라며 응원하는게 아니라, Target을 향해가는 용기를 응원하는 마음을 찾을 수 있을 때가 제법 있다.
20대가 훌쩍 지난 나를 지금도 응원하는 엄마가, 정성들여 뜯어온 쑥으로 만든 향긋한 쑥버무리 한 소쿠리 내어주는 마음같은 것으로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