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누가 잔치가 끝났대?

방문 20일 차

by MoonA

운영하던 영어학원에 보조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질만큼 바빠졌을 때, 용기를 내어 인터넷에 구인광고를 내었다. 많은 이들은 내가 이런 일들을 어려워함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나에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변변치 않은 작은 학원에 풀타임도 아닌 파트타임으로, 아이들을 향한 정성과 사랑마저 겸비하고 들락거려 줄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의심부터 들었다. 행여나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나, 좋은 사람인데 한 달도 채 못하고 못하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부터 앞섰다. 나는 큰 기업체 사장감은 못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구인광고를 내니 그날 저녁부터 톡과 이메일로 이력서와 면접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3명의 선생님들을 면접하고 그중에 한 선생님과 함께 일하기로 했다. 그녀는 오늘 이야기에서 J라고 하기로 한다. J 선생님의 역할은 내가 안에서 수업하는 동안, 교실 바깥에서 아이들의 숙제도 돕고 시험채점도 하고, 수업보다 일찍 오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역할을 100% 이상 해주었다. 영어실력을 키워주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일이라고 항상 생각했던 나의 마음과 그녀의 마음은 같았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그녀였기에, 행여라도 그만둔다는 말이라도 할까 매일 조마조마할 만큼 그녀가 좋았다.


그녀는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더 길게 함께 했고, 걱정했던 것처럼 그녀만의 커리어를 위해서 더 빨리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도 꽤 오랫동안, 아이들은 그녀를 그리워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다 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혜화역에 또 왔다. 이 근처에 사는 J를 만나러.

저쪽에서 그녀가 가느다란 손목을 휘휘 저으며 달려온다. 키도 커서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가까이 올수록 그녀가 더 잘 보인다. 피부에 광이 난다. 나랑 함께 일하기 시작했던 그녀는 고작 이십 대 중반이었고, 세월이 많이 지난 듯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고작 30대 초반이라는 실감이 난다.


그녀는 그만둔 후에도, 나를 종종 찾아주었다. 내가 해준 것보다 내가 받은 게 많다고 여기기에 그녀에게 부채감이 있는데, 그녀는 그때 아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대해주었다. 하지만 사람의 진심을 의심부터 하고 보는 나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이 폭신한 지지에 경계를 놓지 않았었다. 언제든 생채기를 남기고 끊어질 수 있는 관계라고 의심하고 의심했다.


선생님~~~ 배고프죠?
뭐 드실래요?
드시고 싶은 거 다 말씀하세요.
제가 오늘 풀코스로 쏩니다.

지난해, 그녀가 북악산 팔각정 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언제나 제가 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이야기 들어주시고, 조언해 주시고...
정말 감사했어요.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준 것은, 그냥 그날들에 그곳에 있었던 것 말고는 없으니, 이런 말을 들으면 민망했다. 오늘도 역시 별거해준 것 없는 나에게 풀코스를 쏜다고 하니 민망하다.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 토요일 아침이면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구토의 흔적을 찾아 몰려든 비둘기들을 떠올리며, 막걸리를 주식 삼고 파전을 곁들여 보기로 한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다 문득, 그녀는 나를 은인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그녀가 은인이었음도 깨닫는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내가 그럴만한 사람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묵묵히 들어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찾으면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느낌이 몽골몽골 막걸리 잔에서 올라오는 기포소리와 함께 둥둥 떠오른다. 발을 바닥에 붙이고 있기 힘들만큼.


그날들에 나에게도 있었던 그들처럼.

너의 힘든 시간은 이제 모두 끝났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어라고 잔을 부딪혀주던 그들처럼,

이젠 나도, 조금 생긴 마음의 여유를 그렇게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손목을 보며 1인분씩 잡아놓은 소면 두께만큼은 할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에게 서른 초반의 인생은 원래 이런 거냐고 묻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책을 사며 시작했던 나의 서른을 떠올린다. 겨우 서른에 무슨 정기검진을 해마다 받냐고 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이 거기에 있다. 뜨거운 샤워에 핑 돌아 타일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정신 차려야 했던 날도 여러날 있었다. 언제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훓는 검사결과는 이상무. 햇볕에 널린 오징어들처럼 꽁꽁 숨어있는 원인들은 무심히 핑핑 도는 하늘을 수시로 던져주었다.


서른의 인생이 원래 이런 거냐고 그녀가 연거푸 묻는다.

부러질까 조심스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잘하고 있어.
이보다 더 어떻게 잘해.
그리고...
서른, 누가 잔치가 끝났대?
시작이지.

그날들, 그들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들을, 그리고 표정들을 힘껏 떠올려본다.

바통이 넘어온 거라면 내 코스를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나이가 들면서 그들로부터 나에게로 바통이 넘어온 것 같다.

마흔을 넘어가는 내가 서른을 넘어가는 너를 도와주라고

그때 마흔을 넘어가는 그들이 나를 그렇게 열심히 구해주었듯이.


깔깔거리며 웃다가, 그렁그렁하는 눈물을 쎈 척하며 삼키는 서로를 못본 척 해주는 사이,

그러는 사이 우리 사이에 놓인 막걸리와 맥주가 바닥을 보인다.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급했던 나와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급한 그녀의 서른이 만나,

내가 위로받고 싶은 건지, 그녀를 위로해 주는 건지 헛갈리던 즈음, 자리를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안에서 서른의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이 모두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행운이 없었다면 많이 창피했을, TPO 안 맞는 눈물이 자꾸 흐른다.


서른의 나를 위로해주는 좋은 방법은,

오늘, 서른의 누군가를 만나 그 이가 힘을 내도록 내 온 힘을 다해 돕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




이전 10화Li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