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by MoonA

금정역 7번 출구에서 J언니를 만난다.

나를 태운 언니는 인덕원 역 근처에 보아둔 맛집 리스트를 서너 개 훑어주고 고르라 한다. 나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아무거나'라는 말을 냅다 지른다. 나의 짐을 다시 상대에게 넘기는 그 잔인한 말을 말이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마음 속으로 찜해놓은 곤드레밥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J언니는 내 첫 직장에서 내 후배기수로 입사를 했다. 몇 번 만나 얘기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 선배라는 것을 알고는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정 많고 붙힘성 좋은 언니는 쭈뼛거리며 시작한 내 사회생활을 다이다믹하게 만들어주었다. 샌님 같던 내가 언니를 만나고 나이트클럽도 가보고, 밤새 바에서 레몬을 꽂은 맥주병을 놓고 수다를 떨기도 했고, 언니를 통해 소개팅도 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아니었음 너무너무 아쉬웠을, 나 혼자서는 용기를 내었어야 했을 것들이다.


처음 언니가 거주하는 곳에 나를 데려갔던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룸메이트와 공유하는 여성 전용 독신자 아파트_그땐 그런 게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_였는데, 냉장고를 열면 엄마가 해둔 밑반찬이 있는 일상을 살고 있던 나로서는 그날 내가 본 언니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치 동물원에 살고 있는 동물이 정글에 있는 동물을 보는 마음이랄까.


그렇게 비슷한듯 다른 각자의 역사를 시작한 언니와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이다. 문득 외로운 마음에 연락처 목록을 보다 얼른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사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언니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언니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인지 물어본 적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언니는 그런 존재이다.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마음공부를 오랫동안 해온 언니는 내 표정만 보고도 나에게 어떤 조언이 필요한지, 혹은 어떤 조언이 필요 없는지까지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나는 엄마로부터 올라오는 상반된 감정들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걸 언니는 알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공고하게 쌓아 올린 성벽을 엄마는 단숨에 담을 타고 넘어 들어오고, 내가 그런 그녀의 말과 행동에 쉬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리하여 들게 되는 엄마가 미워지는 마음에 대한 죄책감, 뭐 그런 어려움들을 언니는 알고 있다.


너의 마음은 어쩌면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 오랫동안 생긴 감정패턴일 가능성이 커.

엄마가 하는 말이 어릴 때부터 들었던 방식과 비슷하다면 듣는 순간 어릴 때의 네가 깨어난다거나, 그때의 억울함이나 답답함이 올라온다거나, 지금까지의 너의 삶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거나. 과거의 상처와 지금의 현실이 겹치면서 엄마의 작은 간섭도 폭발력을 가지는 거야. 그래서 1년에 한 번 본다는 그 낭만적인 마음이, 그 사실이 위로가 되지 않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과 엄마로 인해 힘들었던 기억에 동시에 진짜야.

그건 네가 좋은 딸이고 싶어서 동시에 올라오는 거야.

죄책감이 올라올 땐, 너는 엄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거라고 생각해 봐. 엄마도 너도 그땐 그리고 지금도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다하고 있음을 믿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느끼는 지금 감정들은 틀린 게 아니야.


곤드레밥에 반찬이 무한리필인, 손님이 끝없이 미어터졌던 식당을 나와, 한적한 동네 언덕을 올라간다. 언니는 익숙하게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고, 요즘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황토길을 걷기 시작한다. '요즘 어때?'라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케케묵은 나와 엄마의 감정의 힘겨루기에 대해 언니한테 털어놓는다. 매번 같은 문제이지만, 도돌이표처럼, 김유신 장군의 말처럼 눈을 감아도 기어코 출발했던 곳으로 도달하고 마는 문제들을 하루종일 퇴근할 엄마를 기다렸던 아이처럼 종알거린다.


언니는 나에게 손에 닿는 법륜스님이다.

그래? 도움이 좀 된다는 뜻으로 들려서 다행이네. 내가 도움이 된다니.

이런 대답도 참 적절해서 좋다.

한달을 한국을 다녀가도 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반나절 이상 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언니도 나도 만족이 없이, 언제나 조금만 더를 외치는 우리들의 욕심인 것을 알기에 '내년엔 언제쯤 오나?'라는 질문에 답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웬만하면 다 별일이 아니더라. 진짜 별일은 아픈 거더라. 아프지 말고. 잘 있다 또 만나자.

호피무늬 블라우스와 다리에 슬림하게 떨어지는 검정 슬랙스가 참 잘 어울렸던 20년 전의 언니가 이젠 황토길마저 어울리는 깊은 여자가 되어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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