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 입학 즈음, 오랫동안 잘되지도, 그렇다고 팔리지도 않던,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가 팔렸다. '서울자가에 대기업다니는 김부장'이 받은 것보다 훨씬 적었지만 그 당시 많은 조기 퇴직자가 그러하였듯이 자영업을 궁리해 보기에 적당한 퇴직금을 받아 투자했던 일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땐 몰랐다. 부모님께 빚이 얼마였는지. 오래된 합성피혁 벨트가 다 벗겨져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을 안 동생과 내가 용돈을 모아 사드렸던 벨트를 받은 아빠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우시는 걸 처음 봤을 때도 빚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그게 얼마였는지, 매일 그 어두운 동굴 같은 곳의 셔터문을 열고 닫는 기분이 어떤 건지, 그걸 자식들에겐 가능한 한 감쪽같이 속여야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땐, 아무리 철이 일찍 들었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 나도, 알지 못했다. 내가 그날의 부모님의 나이가 되었어도 다는 알 수 없을 일이다.
나에게는 결혼 전에도, 후에도 우리 집이라고 부르는 집은 지금의 친정집, 광명시 철산동의 자그마한 아파트다. 왜 그럴까 싶겠지만 그랬다. 결혼을 하고도 내가 사들인 세간살이가 가득한 집에도 우리 집이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다. 지난 40여 년간 한 번도 주소지가 바뀐 적 없는 우리집은 하나다.
가게가 팔리고 엄마는 빚을 갚기 위해 24시간 영업하는 패션몰 코너 분식집에 출근을 시작하셨다. 아빠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공공근로사업으로 벌이를 이어가셨다. 아빠의 모자와 셔츠 어깨엔 언제나 하얗게 땀소금이 내려앉았고, 매일 밤샘근무를 하던 엄마는 몸에 무리가 와서 죽음에 가까운 빈혈과 자궁근종으로 수술을 받으시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도 나와 동생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으로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을 이어갔다. 학교와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는 밤샘근무를 위해 출근하고 안 계셨고 아빠만 계셨다. 엄마가 퇴근하는 아침엔 아빠가 나가셨다.
그렇게 몇 년을 하고서야 빚을 다 갚게 되셨다 했다. 그것도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이다. 이때 내가 놓쳤던 이야기들은 실은 내가 후에 가장 듣기 힘들어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부모님이 가장 어려웠던 시간의 이야기.
여하튼 그렇게, '서울에 있는'은 아니지만 어렵게 마련한 '자가'를 지켜내며, 나와 동생이 대학생으로 고등학생으로 학생답게 살아볼 수 있도록, 부모님이 애쓴 시간을 이제야 본다. 내가 그때 그들의 나이가 되어. 내 머리에도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며.
낡은 아파트 현관문, 운동한다고 11층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계단, 작고 낡은 엘리베이터, 오래되어 더욱 울창한 단지 내 가로수들,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던 야트막한 앞산 단풍나무들, 오래된 아파트라 지하주차장이 없어 지상에 빼곡하게 주차된 차들,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키울 때보다 손자 때문에 더 자주 나갔던 놀이터, 아빠가 좋아하는 순댓국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리모델링을 이유로 폐업한 상가, 엄마가 가끔 내 사이즈를 과소평가하고 사들고 들어온 단추가 잠기지 않는 카디건을 팔던 길가 가판대...
아직도 우리 집이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는 애리조나 우리 집에 오면 한동안은 가기 전에 없던 향수병이 난다. 'Queen Creek'이라고 쓰여있는 길이지만 모퉁이를 돌면 철산역이 나올 것 같고, 아빠 좋아하시는 단팥빵 파는 빵집이 나올 것 같고.
망각의 동물이라 참 다행이다. 조금만 지나면 나는 괜찮아질 것이다. 그곳에 계시는, 매일 그 자리에서 아침,점심,저녁 같은 루틴으로 살고 계시는 부모님도 내 생각 덜하실 것이다.
얼마 전, 아빠 생신이었다. 아빠가 요즘 팔로 하트를 잘 그리신다며 엄마가 사진을 찍어 보내 주셨다.
잘하고 싶은데,
또
몸이 너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