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열흘 정도의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남편의 말에 마음이 갈래갈래가 되었다.
별일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싶은 관성과,
꽤 긴 시간 잠자던 방랑벽이 만드는 반작용의 힘이 겨루는
갈래갈래의 마음을 한쪽으로 정한건 내가 아니라 시간.
출발하는 날 아침의 마음을 보자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머리숱이 지금보다 많았을 땐, 상상도 못하던 여유와 게으름이다.
결국 출발하는 날 아침이 밝았고,
운전이 장기인 남자와 조수석에 오래 앉아있는게 장기인 여자가 어스름 동이 터오는 새벽에 길을 나섰다.
장장 3000마일, 숫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그렇게 표현했고, 나는 지도 위에 점을 이어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그리는 동그라미의 크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비가 내내 오락가락했던 캘리포니아를 통과하는 길에서는 산에서 시작해서 땅끝으로 떨어지는 큰 포물선을 그리는 무지개를 3번이나 보았다. 첫번째 무지개를 보는 마음은 첫만남의 설렘, 두번째 무지개를 보는 마음은 반가움, 세번째를 보는 마음은 권태스러움. 세번만에 훅떨어지는 흥분은 연륜에서 우러나는 기술이다.
첫날 우리의 이동경로.
주유소 3군데를 들린 것 외엔 어디에도 들려간 기록이 없다. 운전이 장기인 남자와 조수석에 장시간 앉아있는게 장기인 여자가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한 오기와 집념이 보인다. 미국엔 한국처럼 맛난 것들로 가득찬 푸드코트가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없다. 대신 필요할 때마다 Exit으로 나가 차에 기름도 넣고, 화장실도 가고,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나 과자 나부랭이들을 살 수 있다. 대부분 고속도로와 근접한 동네의 주유소들 근처엔 이름이 익숙한 패스트푸드 식당들이 있다. 당연 소떡소떡이나 통감자 구이는 없다.
미국 서부, 특히 애리조나와 네바다에서 아주 유명한 주유소 및 편의점 체인, 'Terribles'에 들렀다.
정식 명칭은 'Terrible Herbst'인데, 보통 간판에는 빨간 배경에 하얀 글씨로 Terrible's라고 적는데, 창업자인 Ed Herbst의 별명이 "Terrible(지독한)"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쟁사들이 그가 가격을 너무 공격적으로 낮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인데, 이걸 오히려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서 브랜드 이름으로 만들었단다. 이곳을 들려갈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그의 과감함과 자신감에.
지도 상단에 보이는 햄버거집 'Jack in the Box'에서 저녁을 대충 떼우고, 첫날밤 목적지로 정했던 Sacramento, CA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심드렁했던 마음이 조금씩 여행모드로 바뀌어간다.
길 위에서 세 번의 무지개를 보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