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호텔 조식을 챙겨 먹는다. 장시간 운전과 장시간 착석이 장기인 두 남녀가 오늘도 직진만 하는 오기와 집념을 유지하려면 잘 먹어둬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살짝 높은 이유로 식이섬유를 많이 섭취하라는 의사의 충고는 일단 접어두겠다. 이번 여행 중에는 그리웠던 사람들과 만나 그들과 내 입맛에 딱 맞는 맛난 정제 탄수화물을 잔뜩 먹을 예정이므로.
오늘은 캘리포니아 북부의 겨울을 맞이한 큰 산, Mt. Shasta를 넘어야 한다. 눈 뜨자마자 기상예보를 확인한 남편이 염려하던 폭설예보는 다행히도 없다고 한다. 여정에 한 시간 정도 추가될 것을 각오하더라도 우회길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터였다.
챙겨간 텀블러에 커피를 좀 담아 호텔 카페테리아를 나섰다.
어릴 적, 명절이면 서울에서 대구로 아빠가 장시간_어마어마한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3시간 거리는 언제나 13시간으로 주욱 늘어나기 쉽상이었다._운전하시면 조수석에 앉은 엄마는 졸음을 꾹꾹 참으며 의리(?)를 지키는 것을 보아왔기에 나 또한 하릴없는 조수석이지만 잠을 자지 안... 으려고 무척 애쓰는 편이다. 말이 없는 남편과 그의 취향으로 가득한 노래들로 가득한 차 안에서 말이다. 극강의 난이도 아닌가 말이다.
얼마 전까지도 동네 이웃이었던 친구 부부 D와 S가 Medford, OR로 이사를 했다. 오늘 저녁은 그들의 집에서 머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정오를 조금 넘겨 도착할 것 같다. 좌석 엉덩이 히터 온도를 바싹 올려놓았기에 눈 쌓인 바깥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눈이 오고 비도 오고 얼었다 녹았다 젖은 도로에는 안개도 내려앉았다 걷혔다를 반복하고 앞뒤로 차도 별로 없다. 종종 보았던 뒷골 오싹한 미국 공포영화를 상상한다. 시그널도 오락가락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낯선 이를 만나고, 오두막에 가고, 거기서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일이 생기고 등등등.
내가 그런 상상을 하는 사이 발치에 있던 안개가 산중턱에 걸친 걸 보니 고개를 다 넘어왔나 싶다. 침엽수와 눈, 그리고 안개의 조합이 장관이다. 눈이 비로 바뀌는 듯싶더니, 개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긴장 탔던 어깨를 내려놓는다.
길 양옆으로 여유로이 풀을 뜯는 소들이 보인다. 도로로 나오지만 않는다면 어디가 경계인지 모를 너른 초원에서. 더우나 추우나 작은 축사 지붕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 동네 소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들의 풍요로움을 모르게 하고 싶다. 아는 순간 불행 시작이니까. 우리의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물 안에서 지켜지기도 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싶다.
D와 S의 동네 어귀에 도착했다.
올 가을, D가 찍어 보낸 가을 단풍 영상에 나왔던 그 길이다. 처음인데 처음이 아닌 듯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역시나 사진으로만 보던 그들의 집이 나타난다.
야트막한 언덕 위 집에서는, 아랫동네 전경이 훤하게 보인다. 큰 건물도 큰 산도 번잡한 교통도 없는, 평화로운 동네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나도 모르게 솟아 올라간 어깨가 내려오고 들숨과 날숨이 절로 깊어지고 길어진다.
D와 S의 동네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Downtown Ashland의 단골 커피집을 시작으로 작고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공원들을 둘러본다. D는 내가 잠시라도 멈춰서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면 이내 문을 열고 내 손을 잡아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런 걸 잘 못하는데 D는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에다가 원하는 건 일단 다 말하고 보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다. 옆에서 많이 배우고 더 물들고 싶었는데 멀리도 와있다.
이 동네는 세계적인 셰익스피어 축제의 성지란다. 무슨 말이지? 왜? 영국 아니고 미국에서? 왜?
바야흐로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Southern Oregon University의 젊은 영어 강사였던 Angus Bowmer 가 이 축제를 처음 기획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현대적인 무대보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의 무대에서 공연될 때 훨씬 생동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옛 무대를 그대로 재현하고 싶어 했다. 마침 Ashland 에는 둥근 지붕 없는 극장 벽이 쓰임이 없는 상태였고, 이 극장은 런던의 셰익스피어 전용 극장인 The Globe와 매우 유사했다. 그는 시 당국을 설득해 이 버려진 공간에서 연극을 올리기로 했다.
축제가 처음 시작될 때, 시 의회는 연극만으로는 돈이 안 될 거라며 반대했지만, Bowmer는 오전에는 권투 시합, 저녁에는 셰익스피어 연극을 하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권투 시합보다 연극이 훨씬 더 큰 수익을 냈고, 이때부터 Ashland는 연극의 마을로 정체성을 굳히게 되었다.
현재는 2월부터 10월까지 거의 일 년 내내 공연이 열리는 미국 내 가장 크고 오래된 비영리 전문 극단 중 하나로 성장했고, Bowmer가 처음 발견했던 그 장소에는 현재 밤하늘 별빛 아래서 연극을 감상할 수 있는 거대한 Allen Elizabethan Theatre가 세워져 있다. 마을 전체가 이 축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Downtown Ashland 는 예술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너, 이마에 내천자를 새긴 어떤 이가 커피집에 앉아있을 것만 같다.
역사가 깊지는 않아도 곳곳에 사람들의 사연들이 만들어놓은 분위기가 참 고즈넉하니 정감이 있다.
나는 단골가게 주인도, 오랜 친구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다. 겁이 많아서이다.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 실망할까봐. 서로 상처 줄 일이 생길까봐. 하지만 이곳에서는 왠지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인 건 왜일까?
귀갓길에 만난 사슴 두 마리.
한국에서 본 비둘기들처럼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천천히 갈 길을 가고 있다. 챈들러 우리 동네에도 이렇게 유유자적 산책하는 코요테가 가끔 나온다.
돌아오니 낮에 보았던 동네 전경이 야경으로 바뀌어있다. 절로 아무 생각 없는 이가 된다.
하루가 길었지만,
눈꺼풀은 무겁지만
머릿 속은 깃털처럼 가볍다.
지금 나는 아무도 부럽지가 않아.
부럽지가 않아.
우물 안 개구리한테 물어봐야겠지만,
그이가 행복할 거라 짐작하는 건,
그이도 아무도 부럽지 않지 않을까 싶어서다.
부러우려면 세상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내 위치를 알아채야하는데
그이는 그게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