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도 아침 러닝은 빠트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집에서는 아침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관성과 싸우지만 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하는 여행에서는 출발과 함께 이미 무너진 관성과 싸우지 않아도 되므로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어제까지는 낯선 곳이었지만 로컬처럼 발자국을 남김으로 익숙한 곳으로 만드는, 하찮은 정복욕을 채울 수도 있다는 점도 동기를 돕는다.
저녁부터 꺼지지 않은 불일까,
아침에 다시 켜진 불일까.
내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나보다 먼저 일어나는 이들, 혹은 내가 자는 동안에도 깨어있는 이들이 세상을 편의점처럼 24시간 돌리고 있다. 지난해에 봤던 드라마 '조명가게'에서처럼 이 따뜻하고도 강렬한 불빛들을 검은 안경 쓰고 지키고 앉아있는 이가 저 속에 있을 것 같다. 오늘도 피고 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반나절 지내며 차로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조금 익숙해진 동네 어귀를 빠져나가니 낯선 길들이 이어진다. 뛰느라 생긴 열과 낯섦이 주는 긴장감에 챙겨 입은 경량 패딩 안으로 땀이 나기 시작한다.
패딩을 허리에 질끈 묶고 나니, 차가운 공기를 만난 상체엔 청량감이, 시리던 엉덩이는 따땃하니 속도를 좀 더 내고 싶어진다.
그렇게 달리던 길 위에서 커피집 입간판을 발견했는데, 근처에는 커피집이 보이지 않는다. 화살표를 따라가 인상 좋은 주인장이 말아주는 따끈한 커피 한잔을 들이켜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지불 수단을 챙겨 오지 않았다. 아니다, 핸드폰 안에는 방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전반적인 미국은_전반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_ 확실히 느리게 돌아간다. 최신 트렌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미국에서 봤던 집들은 대체로 '여백의 미'라는 말에는 관심이 없다. 왠지 모르지만 거실이 두 개나 있는 집에 소파도 두 채, 쿠션은 최소 5개씩, 벽면은 각종 그림과 사진을 채운 액자들로 가득 차 있다. 벽이 비어있는 집을 본 적이 없다. 비교적 작은 집들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는 여백이 많다. 사연으로 가득한 소품들이면 행복이 금세 찾아온다.
한편 한국의 집들은 군 인테리어 소품들이 적은 반면, 주인장들의 머릿속은 고물상처럼 복잡하다. 혹시 나만 그랬을까? 설마...
미국 서부영화에서 종종 보던, 간이기차역 느낌의 건물을 지나간다. 외벽에 'Hillcrest Orchard'라고 적혀있는데 주변이 '과수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범상치 않다. 검색을 해본다. 이곳은 지역의 유명 건축가 'Frank C. Clark'가 1917년에 설계, 건축한 주거용 공간과 1926년에 완공된 메인 포장실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당시엔 농장에서 수확한 배와 사과를 선별하고 포장하던 시설이었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국가사적지로 등재된 후, 현재는.'RoxyAnn Winery'라는 이름의 와인농장으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단다. 좀 전에 지나온 커피집 입간판의 주인이 같은 이인가 보다. Roxy Ann. 포도밭주인과 커피집이름으로 꽤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고풍스러운 유물 같은 건물 맞은편엔 이런 게 보인다.
아래 위층으로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이는 이 모던한 건물의 정체는 새로 생긴 커피집이나 미술관이 아니라 'Southern Oregon Neurosurgery', 즉 동네 신경외과다. 단독 건물의 신경외과에 너른 주차장, 일단 신경외과에 볼일을 보러 오는 이들이 주차로 인한 과민성 스트레스는 없겠지 싶다.
미국 의료 서비스는 다양한 편의점 제품만큼이나 품질과 모양과 맛이 다르다. 자본주의가 의료에도 침식한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이게 맞나? 이게 맞지. 이게 맞나? 이것도 괜찮지. 를 무한 반복하게 된다.
여하튼 호텔의 등급처럼 신경외과의 외관에도 등급을 매길 수 있는 미국 되시겠다.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사이프러스가 생각나는, 약 40여 분전보다 훨씬 밝아진 풍경이 길을 따라 펼쳐진다. 애리조나 피닉스의 선인장만큼이나 흔한 측백나무들이 부지런히 프라이버시를 지키다가도 공공장소에선 시야를 확 터주는 것을 반복한다.
약 4마일여를 뛰고 돌아오니, 집주인 D와 S가 깨어있다. 여행에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다. 부지런히 아침준비를 시작하는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얼른 씻고 나와 상차림을 돕는다.
재능 많고 열정 넘치는 D는 현재 부동산 산업관련하여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고, 인테리어에도 일가견이 있어 그녀가 손을 대면 곳곳이 영국왕실 같아지고, 요리도 호텔 조리사급이다. 내가 시시하게 보는 미국식 조식도 그녀가 만들면 다르다. 조리 과정을 보고 있으면 호텔 주방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녀가 그렇게 손발이 바쁜 동안, 와인잔이 걸쳐진 창가 바깥 풍경이 너무 예뻐서 찍어보았다.
짧은 사이 마술처럼 식탁 한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언덕 위에 지어진 예쁜 집들에는 예쁜 사연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D와 S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경사진 언덕 위로 올려지은 집들이라 가끔 윗집에서 아랫집 침실이 훤히 보이는 등의 미처 생각지 못한 (?) 문제들로 갈등이 종종 빚어진다는 것이다. 측백나무로 둘러싸 사생활을 목숨처럼 지키려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지만 서로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싫어하는 성향이 이런 것들을 미리 조율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오늘의 목적지인 워싱턴 주로 달리기 위해 또 길을 나선다. D와 S를 보러 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가 곧 오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서로 전하며 인사를 나눈다.
오늘은 날이 흐릴 뿐, 눈도 비도 없다. 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보니 우리는 아직 고도가 꽤 높은 곳에 있다.
길목에 로스팅을 직접 하는 커피집을 검색해서 오레건주에 로즈버드라는 동네에 들리기로 한다. 차에는 급유를, 사람에겐 급카페인을. 작은 동네는 하루 정도 머무르면 또 재미난 이야기들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은 사연이 느껴진다. 레코드 점이 있고, 옆으로 벽화가 있고, 젊은 사람들이 반바지에 어그부츠를 신고 지나가며, 갓 내린 커피 향이 나는 길에 주차를 하고 커피 향을 따라간다.
원두를 로스팅하는 커피집 Bumble & Bee 에서 원두 한 봉지를 산다.
아침 출근 전엔 언제나 국사발로 커피를 들이켠다는 친구 M에게 줄 선물이다. M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면 출근하는 오랜 일상을 묵묵히 해내고 있으며 실은 길고 긴 근무기간으로만 치면 올해부터 연금수령이 가능하여 마음먹으면 정년퇴직도 가능하다. 하지만 살인적인 의료보험료 때문에 여전히 몇 년 전에 내가 선물했던 국사발 크기의 커피잔에 거기에 커피를 마시는 사진을 종종 찍어 보내주며 출근을 지속하고 있다. 가끔 삶은 이토록 헛갈린다.
오레건주와 워싱턴 주의 경계에는 콜롬비아 강이 흐른다. 친구 M과 J, 그리고 그들의 아들 T는 그 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워싱턴 주에 산다. M과 남편은 젊은 시절 직장동료시절부터 오랜 친구이고, 나 또한 M과 그의 배우자 J, 그리고 그들의 중학생 아들 T와도 오랜 친구이다. 두 친구와 헤어져 아쉬웠지만 세 친구를 또 만나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혼자 사시는 연세 많은 삼촌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최근에 이사한 듀플렉스 집의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지만 고맙게도 방 한 칸을 내주었다.
입 짧은 친구, 아시아인 친구, 사춘기 친구 등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장소는 'Oak Tree Station'이다. 각종 국적의 음식들을 판매하는 푸드트럭들이 한 곳에 모여 커다란 푸드코트형식의 식당을 형성한 곳인데, 정통 미국식 스테이크부터 하와이안 음식까지 다양한 메뉴가 있다. 각자 흩어져 음식을 주문한 후, 받아온 진동벨을 들고_드디어 미국에서도 진동벨을 보기 시작한다
무슨말인가 하면 미국에 와서 진동벨 사용하는 식당들을 본 적이 거의 없다_모여 앉아 수다를 떨다가, 진동벨이 울리면 주문한 음식을 받아온다.
식당용 진동벨을 처음으로 상용화한 곳은 미국이라지만, 기술을 완성하여 진동벨 강국이 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점. 한국의 리텍이라는 회사가 삐삐 기술을 식당진동벨에 접목해 미국보다 훨씬 가볍고 수신 거리도 긴 진동벨을 만들었다는 점. 해외에서 보는 진동벨 상당수도 알고 보면 'Made in Korea'인 경우가 많다는 점. 소리 질러!!!
먹음직스럽게 방금 조리된 음식들을 받아 앉은 두 남자가 곧장 향하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수십 개의 수제맥주탭이 기다리고 있는 곳.
로스팅 정도와 원두의 생산지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 커피만큼이나, 김밥 전문점의 김밥 종류만큼이나 맥주의 종류도 그렇게나 많음을 남편을 만나 살면서 알게 되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가방 혹은 신발 혹은 옷 혹은 책을 가지고 싶어 하는 나의 열정만큼 저 메뉴판에 있는 각종 맥주를 다 시도해보고 싶은 이 두 남자는, 이제 그러다간 골로 갈 수 있음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이날 저녁 나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자정을 넘겨서야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달릴 수 있을까? 워싱턴주의 겨울아침공기를 다 마셔버리고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