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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Feb 05. 2021

보드카엔 뭐니뭐니해도 쥬시쿨이다.

쥬시쿨 자두맛 3 에 보드카 2 섞어 기분 전환을 꾀한다. 감추려 섞는 그 맛, 보드카에 콜라, 오렌지 주스, 블루베리 주스, 다양한 잡탕을 마셔 봤지만 쥬시쿨이 단연 으뜸이다. 보드카 뿜는 강력(역)함을 싹 덮는다. 의외의 발견이었다. 엽기적인 떡볶이 주문 때 왔던 서비스 음료였다. 누구의 관심도 없어 냉장고 구석에 박혀 있던 녀석인데, 웬일. 보드카랑 찰떡이라니! 노벨상이라도 받을 듯 격하게 환호했던 기억이 스친다. 쥬시쿨 너란 녀석.


벌컥대며 마실 수 없어 한 모금, 또 한 모금 홀짝인다. 그래봐야 요구르트 맛이지만 알코올 50%나 함유되어 있다는 걸 알아 벌컥은 어렵다. 취하려 마시지만 적당히만 취하고 싶다. 나름의 조절로 목을 축인다. 한 모금 그리워지면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다시 한 모금 그리워지면 또 한 번 가져다 댄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내 얼굴은 달궈져 있다.


뜨거워진 얼굴에 마스크 팩 하나를 붙인다. 술 마신 직후 자주 하는 행동이다. 보통 빨래를 한달지, 설거지를 한달지, 노래 들으며 춤을 춘달지, 뭐든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런 나의 얼굴은 대부분 팩으로 뒤덮여 있다. 뜨거울 땐 찬 게, 찰 땐 뜨거운 게 당기는 거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금방이라도 열이 달아날 거 같은 시원함이 좋다.


어제는 마스크 팩을 한 얼굴로 댄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인간인지 연체동물인지 모를 유연함에 기염이 토 나온다. 어찌나 말랑말랑 하던지, 나도 꼭 그렇게 추고 싶다. 글 잘 쓰는 거 보다, 노래 잘하는 거 보다 춤 잘 추고 싶던 나였다. 잘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거였다. 분절로 꺾이는 몸, 단 0.1초도 놓치지 않는 리듬과 소울. 춤 좀 춘다는 애들한테 보이는 모습이 내게도 보였으면 했다. 버려진 꿈은 아니다. 달아 오른 김에 자리에 일어나 잊지 않고 있는 나의 그 꿈을 실현해 본다. “나는 오징어로 소이다. 아직 죽지 않았소이다. 쟤들만큼 출 수 있겠소이다.”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격하게 웨이브 한다. 가능한 큰 몸짓으로 보이려 팔과 다리를 벌릴 수 있는 만큼 벌려 본다. 헛둘, 헛둘. 되도 않는 몸짓에 급기야 옆에 있던 나의 남자는 터졌다, 빵. 아랑곳함 없이 추었다. 미쿡 어디께 있는 댄스 스튜디오, 저기 입성하고 싶다는 바람에 맞춘 나의 춤 짓은 그칠 줄 몰랐다.


방과 몸이 더욱 뜨거워졌다. 열기를 식히려 한 겨울 입춘, 창문을 열었다.


“오늘 밤 폭설 예정, 아침 출근 길 주의.”


구라는 아니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소복, 제법 쌓여 있기까지 하다. 감상에 젖을만하니 찬 공기가 콧등을 때린다. 오늘부터 새 봄 시작이라 더만, 입춘이 무색하다. 덥지만 추운 게, 그 날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스물께 어느 날, 더위에 한껏 지친 나를, 사람에 치인 나를, 클럽 밖을 빠져온 나를.


...


클럽은 사계절이 같다.

계절을 타지 않고 입는 손바닥 한 뼘 짜리 미니스커트,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채우는 담배 쩐내, 땀내, 수컷내. 열정패기 하나로 모인 젊은이들로 그곳은 마치 동남아가 된다. 덥고 습해 숨이 막힌다. 그럼에도 넘치는 열정을 막을 순 없다. 광란의 밤이다. 그 한 편엔 내가 있다. 춤추러 간 내가 있었다. 둠칫둠칫. 그런 나와 노는 걸 애들은 좋아했다. 쭈뼛대는 버르장머리 없이 좀 열과 성을 다해 추었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환호성도 지르며. 호호호호우!


열나게 추고 나면 한 템포 쉬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쩐내 대신 시원한 공기 한 호흡이 그립다. 여기 사천 원이나 내야 하는 생수를, 제 값 팔백 원에 사먹고 싶다.


“야, 나갔다 오자.”


차갑다.

날숨 한 번에 뽀얀 입김이 만들어 지고, 같이 나온 친구와 의미 없는 팔짱 한 번 껴 본다. 동남아에서 시베리아를 단숨에 건넜다. 그나저나 너무 춥다. 나온지 얼마 안 되어 금세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조금 더 참아본다. 지금 마시는 공기가 달가워 그렇다. 코를 찌르는 아릿한 겨울 냄새가 서울 여기, 나 여기,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저세상에 있던 우리가 물 한 모금에 정신을 차린다.


...


밤의 찬 공기만 마시면 유독 그때가 떠오른다.

겨울밤, 우리 둘은 영원 하자던 이불 속 맹세와, 갑작스레 찾아 온 이별과, 한 숟갈 뜨기 힘든 아픔이, 그렇게 무수한 추억이 있지만, 유독 클럽 앞에서 마신 공기가 기억나는 건. 그곳이 그리워서는 아니겠지만, 그때가 즐거웠던 건 분명하다.


나는 그날과 다르지 않은 차가운 공기로, 창문 앞에 서

숨 한 번 들이 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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