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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May 20. 2022

초딩도 사랑을 아는 것처럼

그 책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글쓰기에 대해 쓰려면 박완서 작가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한평생 집필에 투신한 후 마침내 소중하게 얻은 깨달음을 써야 운치 있고 설득력도 있겠지만, (…).”

최민석, 『꽈배기의 맛』, 북스톤     



지난 4개월 전이라면 글쓰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깨나 진지하게 끼적인 날들이었다. 날과 날이 모여 원고지 600매쯤 써낸 듯하다. 브런치나 블로그에 일부 공개하기도 했지만 아직 수면 중인 글은 훨씬 더 많다. 최 작가는 제가 감히 손이라도 댈 수야 있겠습니까, 했지만 나는 시시콜콜 왁자지껄 쏟아부은 것이다.     



낯짝 좋은 나라고 하더라도 쓰기 전에 고민하지 않던 건 아니다. 나름의 정당성을 갖추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는 글들이 있다.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한 자 떼기가 뻘에 빠진 다리를 빼내듯 그렇게나 무거워, 도통 써지지 않는다는 ‘뻘’쭘한 글 말이다.      

그렇게 감히 내가 글쓰기를 말할 수 있을까, 싶어 망설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5분쯤. 스스로 납득 당해 질펀한 뻘에서 퍽퍽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한 세 가지로, 다음쯤 된다.          




1.

우선 실컷 떠들고도 남을 만한 사유를 장전한 상태였다. 쓰기 시작한 게 지난 2019년 11월부터니까, 이제 2.5년 썼다고는 하지만, 나만 알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2.5년 사이 5년 치는 쓴 듯 하다는 것. 세월이 밀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 1년을 살아도 10년을 산 듯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게 나라는 믿음은 쓰는 나와 공존했다. 글이라는 모래섬에 매몰된 채 살아왔다고 해도 ‘헤헿. 과언은 아니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진실이므로.     

그러니까 정말이지 나는 해줄 말이 많았다. 심지어 베스킨 라빈스 31가지의 컨셉으로 글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진한 애정은 알고 싶어 가까이 다가서게 하고, 만져도 보게 하고 그리고 자꾸만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말이 남한산성 돌탑처럼 쌓여 있었다.     



2.

두 번째는 글이, 사유가 그리고 쓰기가 꼭 누구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관념 때문이다. 스티븐 선배나 장석주 선배만 글을 논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적어도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현재 진행 중이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글을 품은 나의 애정을 쓰지 말라는 글 규율은 없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4학년인 지금에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것은 같은 초등학교 4학년에게, 후배인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이 선배 대박인데’하고 손바닥에 단내 나도록 박수받을 만했다. 아무렴 고등수학이 초딩에게 한낱 외계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초1은 박사가 아니라 초4가 전담해야 한다. 그래서 초4 은경이가 대신 쓴 거다.     



3.

마지막으로 초딩도 사랑을 안다는 존중에서였다. 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4분단 맨 뒷자리에 앉던 김현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동백이 아들로 나온 동구를 닮은 애였다. 어려서도 그게 사랑(?)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걔만 보면 쿵쾅댔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 쓰여 결국 엉뚱한 말 실수를 하게 되는 나를 보며 말이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려 머쓱하게 웃었다. 그 나이에 입 가리고 웃을 정도면 말 다한 거.     


<타이타닉>의 잭이 보기에 “그게 무슨 사랑이니, 우리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그렇지 않아, 로즈?” 한다면 입 가리기에 지나지 않고 그 입을 닫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담보로 사랑하지 않았고 몸으로 사랑을 나눈 적은 맹세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야 김현규, 너 옷에 뭐 묻었어.” 하니 고개 숙여 티셔츠를 쳐다보는 걔에게 “ㅋㅋㅋㅋ인사 잘하신다.” 하고는 도망가는 게 전부였기에. 그럼 김현규는 흰 실내화를 신고 복도 바닥을 뛰는 나를 쫓아오며 “손은경 너 주글래?”하는 게 다였기에. 그렇다고 어린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다기엔 몹시 진심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글쓰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던 말을 몇 차례에 걸쳐 풀 수 있었다. 서른 해쯤 지나 장석주 선배 나이가 되면 ‘철이 없었죠. 글쓰기 초딩이 글쓰기를 말한다는 게….’ 할지는 모른다. 때가 되어봐야 알 테니까. 그러나 달아오른 귓불을 양 손바닥으로 식혀야 할지 언정 후회는 하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만 쓸 수 있는 글에 관한 나의 사유였으니. 글이라면 몹시 진지한 ‘나’이니. 30년이나 넘게 써와 어느덧 중견 작가가 된 후엔 결코 느낄 수 없을 감각일 테니, 감정일 테니. 고로 나중은 나중에 생각할 것. ‘쓸까말까, 감히 내가’로 망설이는 동료가 있다면 한 마디 건네도 될까.     



글은 본디 표현하는 자만 소유 할 수 있으리라.

나무아미타부울 관세음보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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