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누」제2화
처음 시댁에 간 날이었다. 시댁행이라기 보다는 여행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싱가폴, 태국, 중국, 일본, 아시아권 국가는 더러 방문해봤지만 유럽은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지의 땅을 밟는다는 것은 여행과 다름없다.
시댁까지 비행기로 12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우리는 먹거나 자고, 자다 일어나 다시 먹기를 반복했다. 기내에서 시간을 박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둘 뿐이다. 그도 아님 영어 자막밖에 제공되지 않는 그 영화를 봐야만 한다. 그렇게 12시간을 박멸했다. “우리는 곧 안탈리아 공항에 도착합니다. 앉아 계신 좌석 벨트를….” 건조한 기내 공기에 신발이 쪼그라 들었다. 작아진 신발에 간신히 발을 욱여넣고는 기내 통로에 서 내리기만을 기다린다. 어서 탈출하기를.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눈치였다.
공항 밖으로 펼쳐진 안탈리아는 지중해풍 하와이 같았다. 구름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길게 뻗은 야자수 나무가 줄지어 있고 그 모습은 청량하기까지 하다. 본능적으로 공기 한 모금부터 마셔야겠다 싶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내쉰다. 따스한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안탈리아에 젖어들 때 쯤, 멀리서 회색 도요타 한 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 차다.” 남편 훈의 웅얼거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요타가 우리 앞에 멈췄다. 운전대엔 시엄마가 앉아있다. 히잡으로 머리카락과 귀와 목덜미를 가렸지만 분명 시엄마였다. “어서와, 보고 싶었단다.” 인사와 함께 맞닿은 품과 품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온기를 깊게 나눈 후에야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왔다.
도착하니 집엔 아무도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에 고요함만 있다. 아빠는 회사에 갔고 시누이는 유치원에 갔다고 한다. 아빠는 저녁 6시 넘어오고, 기린반이나 햇님반처럼 유치원 ‘생선반’에서 공부 중인 어린 시누이는 오후 5시쯤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한다. 일종의 유치원 픽업 같은 것이다. 혼자서 집을 찾아 올 수 없다고 한다. 어른의 절대적 돌봄이 필요했다.
픽업은 우리가 자청한 일이다. 시침이 숫자 5에 가까워질 무렵 시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미지의 존재와 만남은 귀찮고 성가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기대와 설레임이 되기도 한다. 이번엔 후자다. 널찍하게 뻗은 도로를 두 번쯤 건넜다. 이 길은 꼬맹이 혼자 오기는 힘들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불과 5분 뒤 펼쳐질 장면 같은 것을 상상했다. 내 다리 길이 만한 그 애와 포옹하기 위해 나는 무릎을 굽혀 그 애 시선으로 높이를 맞춘다. 작은 품이 한 다발에 들어온다. 그 애는 여린 두 손으로 내 목을 부여잡는다. 애와 어른이 유치원 한복판에서 포옹을 한다.
저기 알록달록 무지개색으로 칠한 놀이터 같은 게 보인다. 어린 시누이가 다닌다던 그 유치원이다. 놀이터는 커다란 철문에 가로막혀 있었다. 비슷한 시간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는 철문 앞에 서 제 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쇠창살처럼 생긴 철문에 가린 놀이터가 보이다 말다 한다.
오후 5시가 지났다. 철문 너머 꼬맹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콩알만한 아이들이 제 엄마를 발견하고는 책가방을 뒤흔들며 뛰어온다. 와서는 말한다.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짠 것처럼, 전부가 그랬다. 그때 철문 넘어 어린 시누이를 발견한 남편이 말했다.
“엇, 에르바다.”
시누이도 저의 오빠인 남편을 알아본 눈치다. 잠시 멈춰서 ‘헛! 하더니 분홍색 아디다스 책가방을 뒤흔들며 달려온다.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우리 사람’이라 그런지 반기는 마음이 달라진다. 달려오는 귀여움을 한달음에 안고 싶어 철문을 뜯어 버리고 싶었다.
반가움은 어린 시누에게도 드는 감정이었나 보다. 숨도 차지 않던지 어린 시누이는 한 번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더니 소리쳤다.
“Yenge(옌게)!”
예…옌게? 급히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야, 옌게가 뭐예요?”
“새언니라는 말이에요. 오빠의 아내를 부를 때 써요. 엄마한테 배웠나 봐요.”
그때 나는 어린 시누이가 나를 나로서 부르기로 작정한 그 표현, ‘새언니’를 듣고 내 위치를 여실하게 된다. 저 쪼꼬만 것은 나를 만나기도 전부터 새언니로 인지하고 있다. 나만 시누이로 알고 지내면 그만이었을 것을 이 어린이 또한 알고 있다. 고로 우리의 관계는 더 일방적일 수 없게 된다. 그 사이, 폭삭 안긴 어린 시누이는 몸통과 다리 어귀에 원숭이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다소 충격적인 귀여움이 다리에 달라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