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_핑계가 많아서

by 슈히

앞서 말한 내게 조주 기능사를 추천해준 지인은 지금은 안타깝게도 곁에 없다. 내가 관계를 먼저 끊었다. 그 이유는 원만한 관계 지속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21년 4월부터 알고 지낸 해영 씨는 큰 키에 흰 피부, 귀여운 보조개를 지닌 동호인이다. 그녀는 술을 좋아한다. 집에 놀러 간 적이 한 번 있는데, 빈 와인병이 즐비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거 언제 다 마신 거예요?”

“유일한 낙이 술이에요. 술 마시는 거에 대해 뭐라고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고 그만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삶의 재미가 술이라니.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2022년 6월, 내 생일이었다.

“언니, 생일 축하해요!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어요?”

해영 씨가 내게 물었다.

“고마워요! 생일 선물 주게요?”

“네.”

“주고픈 거 줘요.”

“그래도, 받고 싶은 거 받는 게 좋잖아요.”

“해영 씨가 주는 거 받을게요.”

“혹시, 부담스러워요?”

“아뇨, 받고픈 거 말해서 받는 건 별로라서요. 상대가 나름 고민해서 고른 선물을 받고 싶어요.”

결국,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선물 준다길래 속으론 살짝 기대했으나, 준다고 해놓고 안 주니까 섭섭했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이 내게 선물을 줬다. 고작 한 번 만난 동호인이 등산 가방을 선뜻 내밀었다. 매장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가격을 보니, 약 16만 원이었다. 꽤 놀랐다.

가끔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던 어느 동호인도 생일에 연락해 축하 인사말과 함께 기프티콘을 보냈다. U자형의 거대한 베개였다. 그다지 필요하진 않은 물건이었으나, 잠자리 들기 전에 늘 그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됐다.

해영 씨는 그 당시 조주 기능사를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던 중이었다. 그녀가 술 마시자고 해서, 스스럼없이 만났다. 1차로 와인바, 2차로 칵테일바에 가서 분위기를 음미했다. 평소 술을 안 마시는 비음주자가 그녀의 뜻대로 따르니, 그녀는 기뻐했다.

“언니랑 술 마시다니, 영광이에요!”

헤어지기 전, 우리는 웃고 있었다. 아니, 그랬던 것 같다.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마지막일 거라고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해영 씨 좋아하는 거 알죠? 조심히 들어가요.”

취해서, 비틀거리며 귀가했다. 단체 대화방에 사진을 올리니, 오빠들이 내게 술꾼이라고 놀렸다. 농이 과했다.

8월의 마지막 날은 해영 씨의 만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그녀가 그랬듯이, 축하의 인사만 건넸다. 선물은 특별히 챙기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려니, 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9월로 접어들었다.

“뮤직 페스티벌 보러 갈래요?”

그녀에게 연락해 제안했다. 음악회는 몇 주 후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남자 친구랑 가고 싶어요.”

“아, 그래요? 알겠어요.”

7, 8월에는 아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애인 만나느라 바쁘겠거니 싶다가도, 내심 서운했다. 그런 감정을 솔직히 내비치는 게 연장자인 나로서는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드디어!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다. 낌새는 눈치채고 있었다.

“왜요?”

“저는 어서 결혼하고 싶은데, 그 애는 아직 결혼 생각 없대요.”

“왜 없대요?”

“더 놀고 싶은가 봐요.”

“결혼해서 놀면 안 돼요?”

“싫증을 잘 내나 봐요. 그런 사람은 결혼 못 해요.”

“벌써요? 아, 반년 정도 됐군요. 괜찮아요?”

“그간 하도 많이 울어서, 괜찮아요. 잊어야죠.”

헤어진 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처음 헤어진 일은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게 아니었다. 모임에서 만난 33살 남자가 내게 알려줬다.

“해영 씨,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우리, 친한 거 맞아요?”

그녀가 사생활을 내게 시시콜콜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이는 이미 아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모른다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아마 남자 친구가 말했나 봐요. 저는 아무한테도 그거 말 안 했어요.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언니는 편하고, 재밌어서 좋아요. 원래 저는 단둘이 만나는 친구가 몇 없어요. 언니는 단둘이 만나도 되는 사람이에요.”

폭풍우 치는 마음이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공연 보러 갈래요?”

그녀가 애인과 헤어졌으니, 같이 갈 수 있겠다 싶어 또 물었다.

“그날 애매하게 약속이 있어요.”

다른 우선순위가 있을 수 있겠거니, 싶었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담?’

결국, 공연에는 다른 이와 다녀왔다. 해영 씨랑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해영 씨는 답신이 느렸다. 답답한 나머지, 연락이 왜 이리 늦냐고 물었다.

“원래 연락 자주 하는 거, 좀 귀찮아해요.”

그게 다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안다.

‘SNS에서 좋아요 누르고, 업데이트할 시간은 다 있으면서! 내 연락이 귀찮다고? 휴, 내가 너무 집착하는 건가?’

그녀가 주말 내내 시외에 머무른 사실을 안 것은, 며칠 후였다.

“토요일에는 볼 빨간 사춘기 보러 갔고, 일요일에는 언니가 말한 그 음악회 갔어요.”

“왜 나한텐 같이 가자고 말 안 했어요? 내가 음악회 가자고 두 번이나 말했는데…….”

“언니는 인디 음악에 별 관심 없잖아요.”

“지금 그게 핵심이 아니잖아요!”

“언니, 왜 자꾸 서운해해요?”

더 이상 따지고 싶지도 않고,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으며, 내 감정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나버렸다. 그저, 다 내던지고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아, 잊고 있었는데 하나 더 생각났다.

“9월 24일 토요일에 제빵 학원 수업 마치면, 14시거든요. 15시에 해영 씨 보러 갈까요?”

그녀는 여전히 미적지근하게 굴었다. 굉장히 못마땅했지만, 인내하며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만남을 이끌었다.

“호수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앉아서 대화해요.”

그녀가 대답했다.

“학원 수업 9시부터인데, 쉬는 시간 없이 5시간 연달아 수업 들어요. 점심 식사 못 하고 가는 거라서, 배고플 예정이에요.”

“아, 그럼 밥 먹고 천천히 만날까요? 저 11월 말까지 식단 조절해서, 외식은 부담스러워요.”

“응? 그럼 아무것도 안 먹을 거예요?”

“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손가락만 빨고 행복할 순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내가 운전해서 자기를 보러 시외로 간다는데 손님 접대가 소홀하지 않은가? 기가 막혔다.

“아, 그럼 연말에 봐야겠군요. 그냥 해영 씨 얼굴만 보러 거기까지 가는 건 손해가 아닌가, 싶네요.”

사랑이니, 우정이니 그런 개념을 내세우려는 게 아니다. 단지, 일방적으로 노력하는 기분이 드는 관계가 싫어서, 마침내 그녀를 버렸다.

영원히 좋은 사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이 모든 관계에서 늘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질 수도 있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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