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금요일, 칵테일 모임에서 남자 넷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동생들에게 공짜 술을 두 잔이나 얻어먹었다. 원래 평소에도 취한 것 같은 상태지만, 술을 마시니 더 기분이 좋았다. 헤어지기 아쉬웠으나, 다음날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서너 시간 자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여수 백야도 선착장에 가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도수 낮은 술만 골라 마셨기에 숙취는 심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지난번엔 유료인지 몰라서 선착장 전용 주차장에 주차했는데, 이번에는 십 원 한 장이라도 아끼기 위함이었다.
매표소에 들어서자, 손님이 꽤 많았다. 주말이라서, 대기 줄이 길었다.
“슈히 님이시죠?”
앞에 선 여자가 말을 건넸다.
“아, 네! 맞아요.”
“사진을 봐서, 슈히 님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순천인이고, 산악회 활동을 한다고 했다. 이윽고, 광양인도 도착했다. 여자 셋이 모였다. 우연히 매표소에서 여수인 스윔 님과 만나서, 남자들과도 합류했다. 우리는 총 일곱 명이 됐다. 갑자기 인원이 늘어서, 든든했다.
스윔 님은 원래 여수 신기항에서 배를 탈 예정이었으나, 여천항에서 비렁길 삼 코스로 오는 마을버스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차를 배에 싣고 와야만 한다.
선적 비용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비렁길 삼 코스부터 일 코스까지 모두 갈 수 없다. 게다가 자가용을 되찾기 위해서, 반드시 원점회귀를 해야만 한다.
금오도 함구미 선착장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탔다. 학동에서 내려 비렁길 삼 코스부터 시작해 역순으로 이 코스를 지나 일 코스까지 다시 함구미 선착장으로 오는 일정이었다.
스윔 님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길 찾기는 대부분 남자에게 맡기는 편이다. 스윔 님이 믿음직스럽게 앞장섰다.
삼월 초,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길가에 꽃이 펴있는데도,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쳤다.
“여기, 꽃도 안 보고 가요?!”
하늘이 흐려서, 사진을 찍어도 안 예쁠 것 같았다. 그래서, 촬영하지 않고 눈으로만 감상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도 연둣빛이 물씬 피어올랐습니다.
‘아, 봄이야! 이걸 보러 먼 남쪽에 내려온 거야.’
감상에 젖어 있는데, 어느새 혼자였다. 일행들은 저만치 성큼 가 있었다. 부지런히 쫓아갔다.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보였다.
“혹시, 이거 방풍나물인가요?”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월에 매봉산을 등산하기 위해 혼자 금오도에 왔을 때, 방풍나물을 처음 접했다. 이 섬에서 마주치니 방풍나물인 걸 알지, 아마 다른 곳에서 본다면 아마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칠 터였다. 마냥 반가웠다.
‘비렁’은 순우리말인 ‘벼랑’의 여수 사투리이다. - 여수 금오도 비렁길 안내문.
비렁길은 국립공원이나 블랙야크 인증지가 아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기에, 머나먼 길을 달려왔다. 비렁길은 삼, 사 코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들었다. 달랑 두 개만 가기엔 아쉬웠으나, 숙박하기엔 부담스러웠다. 다음 달에 꼭 재방문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삼 코스에서 탁 트인 바다를 만났다. 여자 셋이 벼랑 끝에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다. 하늘이 뿌예서 속상했으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방풍나물 조형물로 장식된 출렁다리를 지났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흰 절벽과 푸른 바다가 조화로웠다. 배 한 점이 떠가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출렁다리를 한참 지나서, 전망대에서 출렁다리를 바라보니 입구와 출구의 원형이 마치 한 쌍의 반지 같았다. 여수 남자 넷이 모여 있길래,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었다.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모자, 선글라스 없어요? 흐리긴 해도, 봄에는 자외선이 강해요. 이제, 관리할 나이라고요.”
일행 중 최연소는 서른한 살이었고, 모두 삼십 대였다. 스윔 님이 말했다.
“선글라스로 가리면, 저 좀 괜찮아요.”
“네? 하하하, 오늘 한 말 중에 가장 웃기네요!”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했다. 아까부터 허기져서, 내내 괴로웠다. 여자들이 준비한 건 과자, 젤리, 샐러드, 과일 따위였다. 탄수화물이 전혀 없었다. 반면, 남자들은 김밥, 샌드위치 등 곡물이 풍성했다.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합류하길 잘했네요. 남자들 없었으면, 여자들 쫄쫄 굶었겠어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삼 코스는 상당히 수월했는데, 이 코스는 만만치 않았다. 배를 놓칠까 봐, 덜컥 조바심이 났다. 다른 남자들은 쏜살같이 내뺐다. 다들 상당히 집에 가고픈 눈치였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동백 하트를 발견했다. 스윔 님과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렸다. 뒤따라온 여동생들도 다가와 별을 만들었다.
“다섯 명이면 완전체인데, 넷이라서 아쉽네요.”
그러자, 광양인이 능청스럽게 두 손으로 별을 만들었다.
“풉! 우리 넷인데, 다섯 명인 척하는 거예요? 너무 웃겨!”
“다들 이런 것도 안 보고, 그냥 가버리네요.”
스윔 님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지난 이월에 여수 돌산도 봉황산을 등산했을 때도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한 달 만의 재회였다.
“경상도랑 전라도는 왜, 서로 사이가 나빠요?”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정치적 요인이 커요.”
“제가 작년 십이월 내내 거제, 올해 일, 이월 내내 통영 드나들었거든요. 고속도로 잘 돼 있어요. 그런데, 전라도는 너무 멀고, 길도 불편해요. 왜 그런 거예요?”
“옛날부터 경상도는 유생들이 많았고, 벼슬하는 선비들도 많았어요.”
“그러고 보니, 역대 대통령들도 경상인들이 많았네요. 그럼, 전라도는요?”
“전라도는 유배지였죠.”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었다.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 아니라서,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점이었다.
어느덧, 선착장에 가까워졌다. 동백이 흐드러지게 펴있길래,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잠시 멈췄다. 스윔 님을 먼저 촬영한 후, 이어서 서로의 모습을 찍었다. 양손을 모아 귓가에 대고 고개를 기대는 자세를 똑같이 했다.
나중에 단체 대화방에 올렸더니, 스윔 님이 한마디 했다.
“이런 사진 올리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바로 답장했다.
“아무도 오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달에 혼자 갔던 식당에 가서, 방풍 막걸리 한 병과 방풍 전 두 개를 주문했다. 방풍 막걸리가 쓴맛이 난다는데, 쓴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술맛을 잘 몰라서 그런지, 특별한 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색깔도 살짝 푸르스름하다고 하는데, 전혀 안 그래 보였다. 그저, 평범하고 일반적인 막걸리였다.
사장님에게 인사드리니, 주인아주머니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식대를 무려 만 원이나 깎아주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사진의 풍경은 어딜 가야 볼 수 있어요? 저 오늘 비렁길 삼부터 역순으로 이, 일 다녀왔는데, 저런 절경은 못 봤거든요. 저걸 보러 오늘 온 건데…….”
“저길 못 봤어요? 저런, 다음에 한 번 더 와야겠네!”
“아뿔싸!”
원래 한 번 간 곳 절대 또 안 가는 주의인데, 끝끝내 보고픈 경치를 보지 못했다. 결국, 다음 달에 여수 금오도를 무려 세 번이나 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