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업신여길까 봐 과부로 살기 싫다고? 체면, 그깟 게 대수라고! 도대체, 왜 갑자기 이리 적극적이야? 부부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어?’
딸이 그간 쭉 지켜본 결과, 부모는 오랜 시간 동안 갈등을 겪었다. 원인은 바로, 금전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과거에 여동생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자녀 입장이기에 정확한 액수를 미처 알 수 없었으나, 집안 분위기로 봐선 소액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에겐 위로 오빠가 넷이나 있었고, 아래로 3살 어린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육 남매 중 둘 뿐인 자매지간이라서, 돈독한 관계였다.
딸은 어릴 적, 이모와 이종사촌이 사는 집에 종종 들러 즐거운 방학을 보내곤 했다.
“언니네 집에 가면, 반찬 가짓수도 많던데…….”
이모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음성이 어린 조카의 귀에 들렸다. 조카는 통화 상대를 이모부라고 추측했다.
‘우리 집이 윤택한가?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아무래도, 이모부가 곁에 없으니 이모 혼자 홍재를 키우는 게 힘들었던 걸까?’
이모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다. 조카에게는 유일한 이종사촌이었다. 자녀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점차 멀어졌고, 방학마다 이어지던 왕래가 마침내 끊겼다.
한편, 조카는 이모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진으로만 보고, 이모부이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수년이 지난 후, 이모는 별안간 다른 남자와 살림을 꾸렸다. 조카는 이모의 가정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반면, 이종사촌은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그가 계부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이모도 그간 나름 사정이 있었겠지만, 언니의 돈을 제때 변제하지 못했다. 돈을 돌려받지 못한 언니의 가정은 한없이 추락했고,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배우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빌려준 돈이었고, 전적으로 어머니의 탓이었다. 급기야, 이혼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딸이 10대일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구나. 아, 그깟 돈이 대체 뭐길래…….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어휴, 이모는 큰돈을 빌리고, 어째서 갚지 않았을까? 혹시, 이모가 어딘가 투자를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왜 갚지도 못할 돈을 빌려서 남의 가정을 망가뜨린담!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망가지다니, 허무하네…….’
딸이 도무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거라 판단한 어머니는 냉랭한 태도로 자리를 떴다. 놀란 가슴을 안은 채, 딸도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대체 제정신이야? 놀랍다, 놀라워! 자녀에게 간을 내놓으라니, 이런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담……?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아비에게 간 이식하려고 세상에 태어났어? 자녀의 의견을 존중하기는커녕 의절하자니……. 무섭다, 무서워! 자녀가 아니라, 보험이네. 자기 맘대로 안 따라주니까, 자녀를 버리겠다고? 세상에……!’
다음날, 딸은 사업주와 면담하기 위해 회사에 출근했다. 신학기를 한 달 앞둔 중요한 시기였다. 2월의 사무실에는 냉기가 흘렀다. 그간 대표는 각 분야의 강사들과 모여 여러 차례 회의했다. 앞으로 어떻게 수업을 이끌어 나갈지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이었다.
피고용인은 고용인과 단둘이 남았을 때, 조용히 고민을 털어놨다.
“아버지에게 간 이식 수술하라고, 어머니로부터 지시받았어요. 절대 제안이 아니에요. 강요이자, 협박이었어요. 만약,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고까지 하셨어요.”
“엥,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세상에, 딸한테 간을 떼 달라고 요구하는 부모가 어디 있담? 친엄마가 맞아요? 계모 아니고?”
“유전자 검사를 해보진 않았지만, 친어머니가 아마 맞을 거예요. 외모가 판박이거든요. 높은 콧대와 각진 턱이 어머니를 쏙 빼닮았죠.”
“아무래도,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나을 듯싶어요! 어딘가 친부모가 살아 계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쩔 셈이죠? 간 이식 수술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일단 독립해서 혼자 살 집을 알아봐야겠어요. 가족의 인연을 끊자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이제, 그 집에서 살 이유가 더 없잖아요. 남남끼리 굳이 왜 한집에서 살아요? 길바닥에 나앉더라도, 당장 나와야죠.”
“그래! 수라 씨 너무 무섭겠다. 돈 필요하면 말해! 월급 가불해줄게. 갈 데 없으면, 어디 고시원이라도 들어가!”
“고맙습니다. 사장님.”
수라는 지난 1월에 면접을 보고, 즉시 채용됐다. 선임 직원이 퇴사 의사를 밝히자, 현영은 급히 후임을 모집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수라가 맡은 역할은 유치원으로 출강하는 예능 강사였다.
평일 오후에 출근해 두어 시간 수업하고, 저녁이 되기 전에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오전과 저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급여도 높은 편이었다. 일을 적게 하고, 여가 시간을 넉넉히 누리고픈 수라에게 안성맞춤인 직장이었다.
현영은 수라 보다 고작 두 살 많은 젊은 여자였다. 어느 날, 그녀는 수라와 단둘이 만나 맛있는 식사를 대접했다. 백화점 인근에 위치한 양식집이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곳이라서 한산할 줄 알았는데, 가보니 점심시간답게 북적였다. 수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현영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수라 씨, 수중에 모아둔 돈은 있어? 돈이 없으면, 당장 집 구하긴 힘들 텐데.”
수라는 고개를 저었다.
“20대 후반에 느지막이 대학원 입학해서, 이제 석사 1학기 남았어요. 논문 작업 중이에요. 논문 합격해야 졸업할 수 있거든요.”
“여태 공부하느라, 돈을 오히려 썼겠군. 그래도,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해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거든.”
“네, 열심히 살아야죠. 그러려고 입사했어요. 잘 부탁드려요!”
사장이 싱긋 웃었다.
“집에 가서 우리 엄마한테 수라 씨 집안에 대해 얘기했거든? 엄마가 깜짝 놀라시더라!”
“그럴 만도 하죠.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던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