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가게 된 계기
충청도 산악회 단체 대화방에서 누군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언급했다. 재밌고, 슬프다고 했다. 지인에게 말하자, 그녀는 이미 영화를 관람한 후였다. 그녀 역시 영화가 볼 만하다며, 추천했다. 손수건을 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민첩히 극장을 찾았다.
조조 영화라서, 극장에는 소수의 관객이 앉아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로 영화에 몰입했다. 영화는 배우 유해진이 보수주인 엄흥도 역, 배우 박지훈이 어린 임금 단종을 연기했다. 엄흥도는 보수주인이라고 불렸는데, 이 단어가 뭔지 몰라서 서둘러 검색했다. 유배지를 관리하는 관직이었고, 생소했다.
'헐, 이게 직업이라니! 심지어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네.'
배우 유지태가 한명회를 연기했는데, 서슬 퍼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양대군은 언급만 될 뿐,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영화는 듣던 대로 매우 슬펐다. 배우 전미도는 단종을 모시는 시녀 역할을 맡았는데, 그녀가 울 때 나도 같이 따라 서럽게 펑펑 울었다.
다른 관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숨을 죽였는데, 혹여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걱정돼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수건 한 장으로는 부족했고, 흠뻑 젖었다. 하도 울어서 꺽꺽 숨을 몰아쉴 정도였다. 관람을 마친 후, 퉁퉁 부은 눈으로 관객석을 나왔다.
이후 식당에서 식사했다. 누구에게라도 공유하고 싶어서, 계산대에서 만난 점원에게 영화를 추천했다.
"아, 제 주변에서도 그 영화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네, 진짜 슬퍼요! 손수건 필수예요."
"좋은 영화 추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몰랐던 역사를 알게 돼서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한편,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호랑이가 갑자기 거기서 왜 나와? 컴퓨터 그래픽도 엄청 어색하던데!"
"아, 그렇게 생각해요? 난 좋았는데. 영화는 창작물이고, 허구잖아요. 호랑이의 등장은 단종의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기 위한 장치죠."
"다들 슬프다고 하는데, 난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안 슬프던데."
"저런! 그랬어요? 비극인데, 왜 안 슬프지? 단종이 너무 어린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잖아요. 청소년 시기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안 슬프다고요?"
공감을 강요할 순 없으나, 황당했다. 그들은 감정보다 작품의 개연성과 완성도를 중요시 여겼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주행 중 라디오를 종종 듣는데, 여기저기서 영화가 회자됐다. 배우 유지태가 출연해 자신이 아직 천만 관객 영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조만간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다. 한국인은 한이 많은 민족이라서, 남의 슬픔에도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시간이 지나자 영화는 흥행했다. 대중매체에서도 앞다투어 단종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영화감독 장항준이 출연한 영상들도 다수 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종의 유배지이자 영화 촬영지이기도 한 강원도 영월군은 수많은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릴 적, 집에 놓인 책장에서 <단종과 엄흥도>라는 책을 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제목만 봐도 고리타분해 보여서, 아예 들쳐보지도 않았다. 그 옛날엔 단종이 누군지 관심조차 없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우연히 읽은 책에서 단종의 무덤 장릉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됐다.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남한강 편>이었다.
'어머, 여긴 꼭 가봐야겠다!'
구미가 당겼다.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고 명했으나,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했다. 그는 눈 덮인 산을 올랐는데, 양지바른 곳에 앉아있던 노루가 놀라 도망갔고, 바로 그 자리에 단종을 묻었다고 한다.
이후, 영월에 부임한 관리들이 자꾸 악몽을 꿨으며 노산군으로 강등당했던 단종이 왕권을 수복하기까지 무려 250년이나 긴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작년 봄, 지인으로부터 영월 할미꽃 축제를 추천받았다. 사진을 검색해 보니, 내가 알던 할미꽃과 달랐다. 할머니처럼 등이 굽고 칙칙한 자주색이 아니라, 신비롭고 아름다운 보랏빛의 꽃이었다. 게다가 고개도 안 숙이고 꼿꼿이 하늘을 향해 있었다.
'색이 참 곱다! 예쁜데, 왜 할미라고 부른담? 직접 보러 가야겠다.'
워낙 꽃을 좋아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할미꽃의 개화 시기에 맞춰 3월 셋째주 일요일에 영월 백운산에 오르기로 계획했다. 강원도 산악회원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