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된 사진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히잡을 둘러쓰고 찍은 나와 민의 증명사진. 사면이 히잡으로 봉쇄된 내 얼굴 속 이목구비는 애당초도 별 볼 일 없었지만 그날따라 더욱 볼품없었다. 민의 얼굴도 별 수는 없었고. 여고 시절 사회 선생님이 수업 중간에 들려주셨던 사담이 생각났다. 올백 스타일로 머리를 묶고도 예쁜 여자가 진짜 미인이라고. 그때 선생님이 꼽은 미인의 예시가 김태희였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김태희가 올백 스타일로 열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날 증명사진을 보고 우리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깨우쳤다. 김태희와 우리는 다른 종족이구나.
히잡을 쓰고 사진을 찍은 건 이란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이란에 들어가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사진을 제출해야 했다. 이란 대사관에서 제시한 사진 규정에는 여성의 히잡 착용 의무가 명시돼 있었다. 나와 민은 비자용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을 찾았다.
이란 비자용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자연스레 히잡을 건네주셨다. 사진관마다 히잡이 비치돼 있던 그곳은 튀르키예 북동부 도시 트라브존(Trabzon). 이란 대사관이 있어서 우리처럼 이란 비자를 받으러 온 여행자들이 많은 도시였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게 좋으셨는지 사장님은 사진 몇 장씩을 더 인화해 주셨다. 프로필사진까지 덤으로 찍어주셨다. 물론 히잡을 착용한 채로. 우리는 외쳤다. 좋은 기념품이다! 한국에 들고 가서 친구들한테 자랑할 생각에 마음이 달떴다.
튀르키예 동쪽 국경 일부가 이란을 면하고 있었다. 접경 지대에 있는 국경검문소에서 의례적인 심사를 통과하면 발 밑이 바로 이란 땅이었다. 물론 입국 과정이라고 예사롭진 않았다. 검문소 직원이 나랑 눈 마주치기가 무섭게 내 복장의 문제점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지적했다. 나는 곧장 카디건을 껴입었다. 반바지를 벗고 롱스커트로 갈아입었다. 가지고 있던 여름용 원피스를 히잡 대신 머리에 둘렀다. 주르륵 흐르는 땀은 카디건 팔소매로 쓱 닦았다. 한여름이었다.
민은 마침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 교사로 2년을 살다 온 참이었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거주국에서 건너온 이답게 그녀는 히잡 쓰는 것에 능숙했다. 스카프로 얼굴 가장자리를 360도 두르고 스카프 한쪽을 스카프와 귀밑 사이 공간에 쏙 집어넣으면 됐다. 민은 그걸 자바(Java: 수도 자카르타가 위치한 인도네시아 섬) 스타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수도 테헤란(Tehran)에 와서 보니 테헤란 스타일은 조금 달라 보였다. 더 쿨하달까. 더 모던하달까. 이마와 전두엽은 훤히 드러내고, 정수리쯤에서 높이 묶어 올린 뒷머리에 히잡을 톡 하고 걸치는 게 이곳에서 유행하는 스타일 같았다. 나도 스카프 하나를 사서 따라 해 봤다. 똥 머리를 최대한 높게 묶어 그 위에 스카프를 톡. 맘에 들었다. 절반의 머리발은 받을 수 있어서.
나랑 민이 이러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면 가끔 이란 언니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해 왔다. 무슬림처럼 입은 동양인 여성들이 신기해서 그런 거였겠지만 우리 눈엔 그들이 훨씬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스타일리시하게 히잡을 두른 이란 언니들이 눈만 깜빡여도 바비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사진 몇 장을 함께 찍고 나면 우리는 남자들이 이해 못 할 여자들만의 대화를 끝없이 이어가는 식이었다. “어머, 너 너무 예쁘다!”,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로 더 예뻐!”와 같은 주고받기의 무한 반복.
패러디라도 하듯 이란 여성들의 복장을 야금야금 따라 하다 보면 이란 여행을 위한 큰 고개는 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더 큰 고개가 남아 있었다. 라마단이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 천사 가브리엘이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처음 가르친 신성한 달이다. 무슬림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에 금식하는 기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태양력상으로는 매해 그 날짜가 달라지는데, 우리가 여행하던 2013년의 라마단은 7월 초부터 8월 초까지였다. 이란 국경검문소를 넘은 게 7월 말이었으니까 우리는 튀르키예에서부터 이미 라마단을 지내오고 있었다.
튀르키예의 라마단은 괜찮았다. 거기선 해가 떠있는 와중에도 외국인에게 음식을 내어주려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 국가이거니와 외국인 여행객들이 넘치는 관광국이라서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란의 라마단은 달랐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낮 동안에 문 연 식당이 없었다. 이럴 줄 알고 밤 동안에 미리 배를 불려뒀던 현지인들의 팁을 우리만 몰랐단 게 야속했다. 중천에 떠서 내려올 생각 않는 해는 더 야속했다. 뱃가죽과 등가죽이 달라붙을 듯했다. 찌는 더위에 껴입은 카디건과 히잡마저 짜증스러웠다. 당만 떨어지면 예민 보스로 돌변하는 나 때문에 민은 고생을 이중으로 했다. 미안했다.
그때 이란 언니들이 베푼 자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영 이란을 덥고 배고픈 곳으로만 기억했을지 모른다. 남부 도시 쉬라즈(Shiraz)에 위치한 샤예체라그 모스크. 오후 녘 온몸에 힘을 잃고 터덜터덜 들어간 그곳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인파가 가득했다. 이프타르(iftar)를 먹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었다. 이프타르란 라마단 기간에 해 진 뒤 먹는 첫 끼니를 말했다.
정수리에 히잡을 톡 걸쳐 올린 인형 같은 이란 언니들이 우릴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서 같이 먹잔 뜻이었다. 체면치레로라도 거절할 힘이 없었다. 염치는 더 없었다. 눈이 퀭해진 우리는 언니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릴 잡았다. 그리고 그들이 싸 온 커리며 빵을 와구와구 집어 먹었다. 그제야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먹어서 힘이 난 덕인지 자비에 감사한 덕인지, 아름다운 언니들 얼굴이 더욱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무슬림들은 해 뜬 시간에 금욕하는 것뿐 아니라 해 진 뒤에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라마단의 의미를 실현한다고 했다.
적잖은 고개를 넘어야 했던 우리의 이란 여행. 이 여행을 다녀온 뒤로 어느덧 십 년이 흘렀다. 다행히 나는 이란을 덥고 배고픈 곳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덥고 배고팠지만 언니들의 친절과 자비가 감동적이었던 곳으로 기억한다. 허기와 짜증이 나를 잠식해오려 할 때마다 이란에서 겪은 라마단을 떠올리기도 한다. ‘배고파도 조금만 참자. 최소한 여기선 뭘 사 먹을 수라도 있잖아.’
최근 들어 이란 여행을 더 자주 떠올린 건 매일 같이 들리는 이란 시위 뉴스 때문이다. 나는 궁금하다. 그해 여름 유적지에서 우리랑 사진을 찍었던 언니들, 샤에체라그 모스크에서 우리한테 아낌없이 빵을 찢어주었던 언니들, 대장금과 주몽을 재미있게 봤다며 드라마에서 익힌 한국어 문장을 수줍게 따라 해 보였던 언니들. 그 언니들도 지금쯤 테헤란 어딘가에서 시위하고 있을까.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마흐사 아미니의 넋을 기리며 히잡 착용 의무 규정에 반대 목소리를 더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안전할까.
뭇 이란 여성들이 갈망하는 게 히잡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라고만 짐작해 왔는데 그런 내 시각의 편협성을 깨우친 것도 최근이다. 여성 의복 규제와 관련한 이란 현대사의 흐름을 비로소 알게 되고서다. 도리어 이란 여성들이 히잡 착용을 허용해달라고 목소리를 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란 근대화의 기치 아래 팔라비 왕조가 1936년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했던 때의 일이다. 교리의 신성성과 관습 등을 이유로 당시 일부 여성들은 히잡 착용 금지 규정에 항거했다. 반면 2023년 현재 진행 중인 히잡 착용 반대 운동의 시원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이란 이슬람 왕국은 여성의 히잡 착용을 다시 의무화했다.
오늘날에도 히잡 착용을 옹호하는 이란 여성들의 주장 역시 거세다. 히잡 착용 의무에 반대하는 반정부 여성 집단 시위와 히잡 착용 의무에 찬성하는 친정부 여성 집단 시위가 한데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이쯤 되니 문제는 착용이냐 미착용이냐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착용 또는 미착용을 규제하려 드는 규정 그 자체인 것만 같다. 규정이 필요하다는 그 오만한 발상인 것만 같다. 그러한 규정이 정말로 신의 뜻이었을까. 나는 이 세계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자비로운 존재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여성이 머리카락을 가렸는지 안 가렸는지를 따져가며 축복을 베풀지 말지를 가르는 쩨쩨한 캐릭터는 신의 캐릭터가 아니다. 인간의 캐릭터다.
어떤 차림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신과 대화할지는 여성 본인이 결정하면 된다. 필요한 건 자율이다. 착용할지 말지를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내 판단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자율. 2013년 이란을 여행했던 민과 나도 이란 국토를 벗어나기만 하면 곧장 회복할 수 있었던 그 자율.
우리에게 주어진 복장 제약이 한시적임을 알았기에 나와 민은 그 제약을 놀이 삼아 즐길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노력해서 획득한 것도 아닌 무한한 자율을 누렸던 내가 히잡 착용을 재미난 체험 또는 무용담의 화제 삼았던 것이 이제 와서 부끄럽다. 십 년 전에 만난 이란 언니들 정수리에 톡 하고 씌워져 있던 히잡의 의미를 지금 와서 되돌아보는 것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기를.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는 나의 조용한 응원이 이란을 향해 달려가는 봄의 발걸음에 동력을 보태 주기를. 나는 궁금하다. 이번 이란 시위의 결말이. 그리고 기원한다. 언니들의 자율을. 언니들의 무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