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핸드폰과 가이드북을 손에 붙들고 있었다. 캘린더에 일정들을 채워나가느라고. 오늘은 마누엘 안토니오 국립공원 투어를 했으니까, 내일은 선셋 보트 투어를 하고, 모레는 토르투가 섬 투어를 하고, 글피는 까뇨 섬 투어를 해야지. 동선, 교통편, 투어 예약을 알아보느라 온 정신이 핸드폰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어느덧 카페 밖에선 스콜이 퍼붓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까맣게 몰랐다.
카페 직원 말이 맞았다. 비는 금세 멎었다. 서둘러 길가로 나갔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카페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니까 뛰어가면 10분 안엔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런데 뛰어도 뛰어도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길을 잘못 든 거였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되돌아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었다. 야속했다.
15분보다 한참을 더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정수리를 허리춤까지 내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헐레벌떡이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놀라웠다. 온 세상이 붉었다. 그리고 고요했다. 진분홍빛 저녁놀이 하늘은 물론 일대의 바다와 우림까지 모두 집어삼킨 참이었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석양 전망이 끝내준단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장관일 줄이야. 숙소가 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듯했다. 비스타 세레나(Vista serena). 평온한 전망이라는 뜻이었다.
내일은 선셋 보트 투어에서 선셋을 보게 될 거였다. 모레는 토르투가 섬 투어에서 밤늦게 숙소로 돌아올 거고, 글피는 이 도시를 떠날 거였다. ‘비스타 세레나’의 석양을 볼 수 있는 저녁은 오늘이 유일한 셈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꾸역꾸역 달려온 거였다. 이놈의 선셋을 보겠다고. 석양 전망으로 유명한 숙소의 석양 전망을 기어코 놓치지 않겠다고.
적요한 낙조가 눈앞에 흐르는데 마음 한편이 야릇했다. 방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 낙조 위에 오버랩됐다. 전투적으로 투어들을 예약하던 내 모습. 해거름을 놓칠세라 숨이 차오르도록 뛰던 내 모습. 궁금했다. 이게 정말 내가 기대했던 여행의 그림이 맞나. 나는 이 여행에 무얼 바라 이토록 조급해졌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숙박객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들만은 진정으로 평온한 전망을 누리길 바라며.
사실 내가 조급해진 이유는 뻔했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였다. 코스타리카에서 나한테 허락된 시간은 총 10일. 그마저 첫날은 밤늦게 입국하고 마지막날은 아침 일찍 출국하는 일정이니까 실질적으로 허락된 시간은 8일이라고 봐야 했다. 들인 자원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8일을 여행하겠다고 편도 40시간의 여행 시간을 감수한 것 하며, 높은 항공료와 코스타리카 물가 하며. 결국 나는 주어진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본전을 뽑아야겠단 생각에 성말라진 게 분명했다. 이 여행이 어떻게 흘러가야 본전을 뽑았다고 볼 수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러던 내가 조바심을 조금씩 떨쳐내게 된 계기가 있었다. 키이스(Keith)였다.
사흘 뒤 예정대로 떠난 까뇨 섬 투어에서 키이스를 만났다. 우리가 함께 한 투어는 스쿠버 다이빙 투어. 까뇨 섬은 해저 환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바로 그 바닷속에 몸을 던질 기대로 다이버들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내 얼굴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곱절은 더 상기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까뇨 섬 다이빙에 대한 내 기대가 유독 컸다. 이곳이 다이빙 성지라는 소문을 한국에서부터 듣고 온 것도 있었고, 바로 전날에 다른 도시에서 했던 스쿠버 다이빙이 기대에 영 못 미쳤던 탓도 있었다. 오늘의 다이빙은 어제와 다르길 바랐다. 오늘에야말로 내 오랜 기대가 보상될 거라고, 보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 만난 미국인 다이버 키이스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상투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예를 들면 “오늘의 다이빙은 근사할 거야!” 정도의 반응. 처음 만난 사이에서 침묵의 공백을 메우자고 나누는 대화는 으레 그렇게 흐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키이스가 내놓은 대답은 그 예상을 제대로 비켜간 것이었다.
다이빙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지. 좋은 다이빙 그리고 굉장한 다이빙. 어떤 다이빙이든 적어도 우리를 물에 젖게는 하잖아(At least, we get wet)!
그 순간 문득, 내가 코스타리카에 오기로 처음 마음먹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스페인 대 코스타리카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한 방송사가 매 경기를 중계하기에 앞서 그 경기를 뛰는 나라들에 대한 소개 영상을 띄워주었다. TV 화면에 코스타리카 소개 영상이 흘러나왔다. 5백만 인구가 사는 나라. 세계 최초로 군대를 폐지한 나라. 면적 대비 생물다양성 자원이 가장 풍부한 나라. 국민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 코스타리카 국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인사말은 “푸라 비다(Pura vida)”라고 했다. 직역하자면 ‘순수한 삶’이라는 말.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코스타리카 국민의 낙천성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했다.
소개 영상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됐다. 중계 화면에 코스타리카 선수들과 관중들의 얼굴이 거듭 포착됐다. '푸라 비다'의 산증인일 그들의 솔직한 민낯을 지켜보며, 내 생각은 점차 부풀어 올랐다. 점차 단단해졌다. 생각은 다짐이 되고 계획이 됐다. 아마도 이번 휴가에는 내가 저들의 나라에 가있게 되리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말로 그곳에 와있었다. 코스타리카. 평화와 자연을 수호하는 삶들의 순결한 터전. 정말로 여기선 모든 대화가 "푸라 비다"로 완성됐다. "예스" 대신에도 "푸라 비다", "오케이" 대신에도 "푸라 비다", "굳" 대신에도 "푸라 비다". 이곳 사람들에게 푸라 비다, 즉 '순수한 삶'이란, 자신의 안팎을 거쳐 가는 모든 흐름에 대한 궁극의 긍정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군 병력을 해체시켜 세계 평화에 대한 의지를 입증해 보인 것, 국가 자산을 군사 무장 대신 국민 보건과 교육에 고루 쓰겠다고 천명한 것, 코스타리카 영토 내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종에 대한 절대 보호를 위해 힘쓰는 것. 이 모든 자연 순응적인 움직임의 배경에도 푸라 비다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나는 차차 이해했다. 코스타리카인들은 우리 모두가 지구를 잠시 '흘러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코스타리카 땅을 처음 밟았던 순간부터, 이곳 사람들이 체화한 긍정의 세계관 한가운데로 몸을 던진 순간부터, 이미 코스타리카라는 맑은 물에 흠뻑 젖은 셈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가 이 물에 몸을 푹 담근 이상, 이 여행은 좋은 여행 아니면 굉장한 여행 중 하나가 될 뿐이지 않을까. 다이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다이빙과 굉장한 다이빙만이 있을 뿐이듯.
키이스 말이 옳았다. 어제 한 다이빙에 아무리 낮은 점수를 준대도 그 다이빙을 나쁜 다이빙으로 칠 순 없었다. 오래간만에 해저를 유영한다는 사실만으로 벅차오르던 감정이 있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진 유쾌한 다이버 친구들도 있었다. 오매불망 고대해 왔던 코스타리카 바닷물에 내 몸을 흠뻑 적실 수도 있었다. 고작 가오리, 랍스터, 문어, 상어를 못 만났단 이유로 어제의 다이빙을 폄하하려 했다니. 편협한 생각인 줄도 모르고 신나게 입을 놀려댔던 내가 우스웠다. "정신 차려!" 하고 꾸짖지 않고도 나를 일깨워준 키이스에게 고마웠다. 고맙단 말 대신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좋거나 굉장할 뿐일 오늘의 다이빙을 기대하며.
우리가 탄 보트가 까뇨 섬을 향해 나아갔다. 키이스는 말이 없었다. 세상의 끝을 좇듯 바다 저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도 그의 시선을 좇아 바다를 봤다. 하늘과 태평양을 가르는 수평선이 티 없이 곧았다. 안온했다. 바다 날씨도, 내 마음도. 성난 불도저처럼 여행 일정을 밀어붙이던 자아에게는 이제 그만 깊은 휴식을 허해도 될 것 같았다. 드라마틱한 사건, 스펙터클한 광경, 인스타그램에 자랑할 만한 사진. 모두 부질없어 보였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만큼 완전한 순간도, 이 완전성을 제대로 포착할 방법도 없으리란 걸 알았다. 바로 그때.
푸라 비다!
뱃고물에 앉아 있던 가이드가 다급하게 소릴 쳤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대한 남색 생명체가 곧은 수평선 위로 완만한 포물선을 그려 보였다. 웅장한 숨소리가 났다. 그 고귀한 들숨과 날숨으로 인해 일대가 완벽하게 환기된 느낌이었다. 혹등고래였다. 나는 코스타리카 태평양 한가운데서 혹등고래를 만난 거였다.
하지만 확신했다. 내가 오늘 이 시간을 굉장한 여행으로 기억하게 된다면 그건 저 혹등고래의 덕분만은 아니리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