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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Nov 12. 2024

어디쯤 왔을까

후안.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180센티미터를 넘는 큰 키.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 그리고 목소리. 그 목소리가 제일 기막혔다. 맑고 풋풋하던 소년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땅을 뚫고 들어갈 듯한 저음이 후안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올라(Hola: 안녕), 진!" 놀란 나는 냅다 비명을 지르 말았다. 꺅!


내가 알던 후안은 열세 살 소년이었다. 키는 나보다 아가 주먹 하나만큼이 더 컸다. 볼은 희고 말랑말랑했다. 엄마 친구인 내 곁에 꼭 붙어서는 "떼 끼에로(Te quiero: 너를 좋아해), 진!", "떼 아모(Te amo: 너를 사랑해), 진!"을 서슴없이 외쳐댔다. 그렇게 천진난만하던 소년이 청년이 되어 있다. 벌써 열아홉 살이란다. 우리가 떨어져 지내온 햇수를 세어 보면 거짓말은 아닌데 거짓말 같았다. 그의 나이도, 지금 이 순간도. 


건강한 성장은 축복받아 마땅한 일. 그런데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청년 후안과 소년 후안이 아예 다른 인격체라는 사실을 감지해서였다. 내가 나타나면 뛸 듯이 기뻐하고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후안은 이제 없었다. 내 핸드폰으로 자기 셀카를 찍고는 '내가 그리울 때면 이 사진을 보며 나를 생각해'라고 메시지를 남겨놓던 후안은 없었다. 작별의 순간에서마다 "우리 이제 언제 또 만나?" 하며 슬픈 눈망울을 짓던 후안은 없었다. 대신 청년 후안이 그곳에 있었다. 나와의 만남이 어색한 듯, 엄마 친구보다 자기 친구들과의 약속이 중요한 듯, 짧은 인사 뒤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후안.


후안네 가족과 친구가 된 건 6년 전 스페인 팜플로나에서였다. 소몰이 행사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를 보러 갔다가 만난 4인 가족. 엄마 토니, 아빠 에밀리오, 첫째 아들 에밀리오, 그리고 막내 후안. 매표소 대기열에 서 있던 이들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었다. 내가 찾던 매표소가 맞는지 확인하려고였다. 그러자 엄마 토니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런데 예쁜아, 어쩌다 이 도시에 너 혼자 와 있게 된 거니?" 그렇게 한두 마디씩을 덧붙여가다 우리는 친구가 됐다. 마침내는 1박 2일 동안 산 페르민 축제를 함께 즐겼다. 막둥이 후안이 특히 나를 좋아라 했다. 자기네가 사는 코르도바로 내가 꼭 와야 한다고 몇 번을 당부하기도 했다. 나는 그 약속을 잊을 수 없었다. 처음 본 나를 맹목적으로 아껴 주던 그 순수한 마음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팜플로나를 떠나고도 우리는 이따금 만났다. 후안의 바람대로 코르도바에서. 아빠 에밀리오가 일하러 나가고 첫째 아들 에밀리오가 공부하러 나가면 토니랑 후안이랑 나만 남았다. 우리 셋은 카페에 가고 꽃집에 갔다. 성곽으로 나가고 강변으로 나갔다. 엄마를 잘 따르는 후안은 엄마가 아끼는 나도 잘 따랐다. 나는 스페인에 가족 하나가 더 생겼다고 믿었다. 이 관계성에 변화가 생기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벌써 6년 전 이야기. 사계절을 여섯 번 지나 보내고 마침내 스페인에 돌아와 보니 소년 후안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흘러간 시간의 무게를.


인간은 정말로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보는가 보다. 나는 미처 보지 못했었다. 6년은 소년을 청년으로 만들 힘을 지닌 시간이란 걸.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토록 힘 있는 시간만큼 나도 내 가장 젊은 시절로부터 멀어져 왔단 걸. 손아귀에서 모래알이 한 움큼 새어나가는 서글픈 촉감이 떠올랐다. 믿기 싫은 현실로부터 기어코 시선을 거두어온 지난날들을 자각했다.


처음 서른 살이 됐을 때는 별다른 실감이 없었다. 오늘이 어제와 같았고 아직 내가 20대인 듯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비슷했다. 요즘엔 나이에 0.8을 곱해서 생각해야 맞다는 둥, 스킨케어를 잘 해온 세대라서 '흘긋' 보면 20대로 보일 가능성도 없지 않을 거라는 둥, 자기 합리화의 늪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30댄데!) 그러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서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피부과에. 눈가의 주름도 펴야 할 것 같고, 처진 턱살도 끌어올려야 할 것 같았다. 푸석푸석해져 가는 피부에는 물광 요법이 절실해 보였다. 그렇게 얼굴에 돈을 바르고 집에 돌아와서는 무의식 중에 생각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시간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고.


하지만 붙잡는다고 붙잡히는 시간이 어디 있을까. 시간은 순리대로 흘러만 갔다. 그리고 30대 후반이 됐다. 나는 점차 내 나이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갔다. 비위 상하는 대상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눈길을 돌리듯. 어른이 된 후안을 보고 그토록 놀란 것도 당연했다. 내가 걸어온 시간의 무게를 의식적으로 잊고 지내왔던 내겐 후안의 변화가 그저 갑작스러워 보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20대 때부터 나이 먹는 걸 두려워했다. 그때 내 두려움의 포인트는 조금 특이했다. '내 여행이 더 이상 젊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었다. 그땐 내 여행이 재미있을 수 있는 건 다 내가 젊기 때문인 거라고 생각했다. 현지인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 때론 내게 필요 이상의 친절과 애정을 베풀어 주는 것. 그건 다 내가 젊은 생기를 내뿜는, 위협적이지 않은 작은 여성인 덕분인 거라고 믿었다. 낯선 여행자들과 열띤 교감을 나누며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나 스스로가 젊은 배낭여행자이기에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 먹고서도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 더 이상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시간이 더디 갔으면 했다.


물론 시간은 내 바람일랑 아랑곳없이 잘만 갔고, 나이 앞자리가 바뀐 지도 몇 년이 됐다. 다행히 내 여행은 아직 반짝인다. 단지 내가 아직 충분히 나이 들지 않아서인 것 같다. 외국에선 동아시아인 들을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어리게 봐주는 느낌이다. 한국에선 동안 소리 한 번 못 들어본 나도 외국에선 한참 어린 배낭여행자들과 큰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현지인들로부터도 애정 어린 관심과 배려를 여전히 체감한다. 내가 두려워했던 여행의 변화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이 든 뒤에라야 실감할 수 있는 모양. 나는 그저 그 실감을 유예하며 20대 때와 다르지 않은 여행 스타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다르지 않음이 도리어 두렵다. 20대 때는 나이 먹고서 변할 것들이 두려웠다면, 지금은 나이 먹고도 변하지 않을 것들이 두렵다. 외적으로 이루어놓은 것 없이, 내적으로 성숙한 것 없이, 생물학적 나이만 뒤룩뒤룩 먹어가는 것이라면 어떡하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내 알맹이는 어제와 똑같은데, 껍데기만 늙어 가게 내버려 둬도 괜찮은 걸까? 막연히 노화를 두려워했던 나는 노화보다 더 두려운 존재를 깨달았다. 그건 정체였다.


내겐 자율성이라는 대전제가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단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형태를 선택했다. 하지만 때론 내 삶이 지나치게 자유롭기만 한 건 아닌지 돌아본다. 삶을 오로지 자유, 자유, 자유로만 가득 채워 모노톤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닌지. 십여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본다면 일상에서 자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규모만 약간 커졌을 뿐, 이 밖엔 이렇다 할 만한 외적 변화를 떠올리기 어렵다. 이러다 삶의 권태가 나를 덮칠까 염려스럽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아 그런 거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누구의 삶도, 앞으로 맞이할 어느 시점의 내 삶도, 지금 내 삶처럼 만족스러울 순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만족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아야겠다고 거듭 경계한다. 또래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하며 삶의 단계를 밟아 나가는 동안, 설령 그것이 보편적인 계단이 아닐지라도 나 또한 어떤 계단인가는 밟고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책임의 무게를 성실히 견디지 않는 한, 삶에 진정한 자유는 없을 테니.


훌쩍 자라 버린 후안을 보고서 지나간 시간의 무게를 곱씹어 보던 사이, 후안이 자리를 떴다.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단다. 집에는 나랑 토니만 남았다. 아빠 에밀리오는 아직 퇴근이 멀었고, 첫째 아들 에밀리오는 이 집을 떠난 지 몇 달째다. 아들 에밀리오는 최근에 보안청 소속 경찰이 되어 타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빠가 걸은 길을 3대째 따라간 것이다. 고등학생 에밀리오가 다닐 수학 학원을 고르기 위해 나, 토니, 에밀리오가 코르도바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6년 전 이야기다. 6년이 바꾸어놓은 이곳 풍경들이 내겐 아직 낯설었다.


덕분에 토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 같았으면 우리 둘 사이에 후안이 꼭 끼어있었을 거다. 관심을 갈구하는 소년 후안의 장난스러운 방해 공작이 없으니 허전하면서도, 토니와의 대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점 하나는 좋았다. 토니의 이야기는 대체로 시간의 역방향으로 흘러갔다. 장성한 두 아들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최근의 소회에서 시작해서, 십수 년 전 이 두 아들이 갓난아이이던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아빠 에밀리오와 써 내려갔던 결혼 전 러브스토리까지. 때로는 아련한 눈망울로 먼 산을 바라보며, 때로는 날 똑바로 보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토니가 읊조리는 그녀의 일대기가 포근하게 들려왔다. 토니의 역사를 안다고 해서 토니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불완전하고 서툰 이해의 장 속에서나마 나는 그녀를 더욱 지지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니는 이십여 년 전 에밀리오와 결혼하면서 지금 사는 이 집을 샀다고 한다. 이후의 결혼 생활은 집을 사고 남은 부채를 갚기 위한 끝없는 여정과 같았다고. 아들 에밀리오와 후안이 태어나고서는 어깨가 더더욱 무거웠고, 경제 활동과 육아를 병행했던 젊은 시절이 토니 인생에선 가장 어두운 터널을 걷는 시기와 같았단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건강하고 바르게 장성한 두 아들을 보면 그 행복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란다. 그건 부연 설명을 안 들어도 십분 이해할 것 같았다. 아들 에밀리오와 후안은 훌륭한 청년들로 자라났다. 아빠 에밀리오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유능한 가장이다. 토니는 마침내 그녀 인생이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토니가 걸어온 길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 일순 두 길이 대조적으로 보였다. 타자를 포용한 삶 속에서 사랑과 책임감을 발판 삼아 한 보 한 보 나아갔던 토니. 주체적인 결정과 독립적인 책임에 만족하며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한 나. 나는 토니의 삶에 서려 왔을 고충과 고초, 그리고 그것을 상쇄하거나 상쇄하지 않을, 혹은 상쇄 여부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는 행복과 보람을 곰곰이 상상해 보았다.


곧이어 집에 새 손님들이 왔다. 알바와 산드라. 스물대여섯 살 먹은 어여쁜 아가씨들이었다. 알바는 아빠 에밀리오의 오랜 친구의 딸이다. 산드라는 알바의 오랜 친구다. 매년 5월 코르도바에서는 성대한 지역 축제가 열린다. 그 축제를 보러 알바와 산드라가 코르도바에 왔고, 토니네 가족이 그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오늘의 손님맞이 메뉴는 빠에야. 스페인에선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큼지막한 팬에 요리한 빠에야를 다 함께 나누어 먹곤 한다. 꾸차라다 이 빠소 아뜨라스(Cucharada y paso atrás). 직역하자면 '한 숟가락 그리고 뒷걸음질'이라는 뜻. 파티장에서 큰 팬 가까이 걸어가 빠에야를 한 숟가락 떠먹고서, 다른 이들도 먹을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비켜주는 관습을 일컫는다.


한바탕 수다를 떨면서 빠에야를 해치우고 나니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짙었다. 코르도바 축제도 절정은 밤이다. 낮과 저녁에는 전 연령대를 위한 축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자정이 넘으면 비로소 젊은이들의 축제가 시작된단다. 당연히 그 중심은 음악, 춤, 그리고 술. 알바와 산드라는 나더러 자기들과 함께 밤 축제에 가자고 했다. 나는 대번에 예스를 했다.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열 살 많은 나를 친구로 맞아들이고 동행을 제안해 준 것 자체가 감격무지했다. 토니는 피곤하다며 "젊은 애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내 등을 밀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나랑 토니도 어림잡아 열 살 차이는 나는 성싶었다. 알바, 산드라와 어깨동무를 하고 코르도바를 종횡무진한 그날 밤. 아름다웠다.


얼마 전 친구 S가 결혼했다. 친구 M과 나까지 총 세 명이 친하게 지내는 그룹의 친구였다. 우리 셋은 인도 캘커타에서 만났다. 그리고 한 달 반을 함께 여행했다. 죽이 제법 잘 맞았다는 뜻이다. 세 사람 모두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도전적이었고, 결혼 제도에 편입하는 결정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끝없을 것 같던 회의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S가 결혼한 것이었다. M 역시 최근에 결혼을 결심하고 예식장을 예약했다는 소식을 S의 결혼식장에서 내게 전해 주었다. 다른 지인들의 결혼 소식을 들었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두 친구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겪어왔을 가치관의 격변을 속으로 그려 보았다.


결혼식 하객들에게 인사하느라 바쁜 S를 먼발치서 바라보며 나와 M이 식사했다. 20대 초중반에 만났던 우리가 어느덧 30대 초중반. 멋진 인생을 궁리하며 함께 걸어온 우리의 이삼십 대를 M과 추억했다. 그러다 M이 내게 물었다.


"언니는 청춘이 뭐라고 생각해요?"

"음, 글쎄.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한 청춘인 것 아닐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나는 이미 청춘을 지나왔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이 청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나는 내가 아직 청춘 같다. 남들이 아무리 "넌 이제 아니야"라고 일러준대도 나는 내가 아직 그런 것 같다. 내가 나 스스로를 아직 자유로운 주체로 여기고 있어서인 것 같다. 나의 관념 속에서 청춘과 자유는 동일시되는가 보다. 그것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후안이 청년이 다 되도록 시간을 뒤돌아보지 않았던가 보다.


토니의 또래라기엔 어리고 알바와 산드라의 또래라기엔 나이 든 나. 남들 눈엔 청춘이 아니지만 스스로의 관념 속에선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나. 지금이 더없이 만족스럽지만 인생이 지금 같기만 할 것을 경계하는 나. 소년이 청년이 되는 시간을 거듭 목도하며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돌아볼 나.


나는 어디쯤 왔을까. 나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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