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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힘을 다해 달려

by 이찬란




수직에 가까운 경사는 오를 때도 힘들지만 내려갈 때도 그에 못지않게 힘이 든다. 게다가 성치 않은 몸에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상태로는 말할 것도 없다. 허둥지둥 언덕을 내려가는 호달의 모습은 마치 녹슨 양철 로봇처럼 처량하게 삐걱대고 있었다. 그나마도 속도가 나지 않아 누구라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뻗기만 한다면 금세 목덜미를 잡아챌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쫓아와 밀린 월세를 받아낼 것처럼 소리치던 총무는 어쩐 일인지 잠잠했다. 그 고요함이 의심스러워 호달은 절뚝이는 다리를 연신 앞으로 뻗으면서도 흘깃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엔 어둠뿐이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제일 막바지에 위치한 이 동네는 해가 저물고 나면 모든 사물이 색을 잃는다. 다만 언덕 중간에 위치한 구멍가게의 간판 불빛만이 수명이 다한 등대처럼 흐릿하게 근처를 비출 뿐이다. 땅에 납작 달라붙은 채 검게 웅크린 것들은 거대한 하나의 그림자처럼 서로 형체를 합쳐 호달을 위협하곤 했다. 어릴 적 겁에 질려 상가 화장실을 드나들던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어둠이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 자기는 무언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숨어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무엇인지 모르기에 대비할 수 없는 것, 그러나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노리며 그를 관찰하고 있을 사악한 어떤 것. 아버지나 할머니의 죽음도 어쩌면 그래서 막지 못한 것이 아닐까. 휴일마다 차를 끌고 아내를 찾으러 가는 아버지에게 매달려 놀아달라고 졸랐더라면, 할머니가 육수를 불에 올려두고 깜빡 잠들기 전 집에 돌아왔다면……. 밤이 되면 호달은 어김없이 그런 생각에 시달렸다.

언덕을 내려온 호달이 숨을 몰아쉬며 속도를 늦췄다. 대로변은 그가 빠져나온 동네와 딴판으로 환했다. 입구 문을 활짝활짝 열어둔 상가들에선 시원한 냉기가 흘러나왔고 저마다 다른 빠른 템포의 음악이 울렸다. 그에 맞춰 사람들의 발걸음도 경쾌했다. 호달은 사람들 사이를 터덜터덜 걸었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가슴께가 뻐근했다.

“앗, 죄송합니다.”

친구와 무슨 이야기인지 재잘대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여학생이 호달과 가볍게 부딪히곤 놀란 눈으로 사과했다. 호달은 가벼운 목례로 학생을 보내고 어깨를 내려다봤다. 반팔 티셔츠의 소매 끝에 아이스크림이 묻어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찍어 입에 넣자 바짝 마른 입안에 달큰한 바닐라 향이 퍼졌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러운 허기가 밀려왔다.


‘아, 배고파.’

겨우 새끼손톱만 한 아이스크림 얼룩 때문에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듯 호달의 감각이 온통 먹을 것에 집중되었다. 거리는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숯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닭꼬치와 맥반석 오징어, 빵틀에서 막 꺼낸 따끈한 와플, 생으로 잘라 막대에 꽂은 수박과 파인애플, 그리고 철판에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떡볶이. 굳이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온갖 먹거리가 대놓고 호달을 유혹했다. 그렇다 한들 어찌할까. 호달에게는 그것 중 단 하나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그나마 휴대폰이라도 있었더라면 몇천 원 남은 통장에서 계좌이체라도 해 급한 허기는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짜…나쁜 새끼.’

차라리 남자가 피시방 매니저에게 멱살이 잡혔을 때 그냥 도망쳐버렸다면 이렇게 얻어맞지도 휴대폰을 도둑맞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불법 촬영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려던 그를 손쉽게 떼어낼 수도 있었을 테니 그야말로 일석삼조 인데 그 순간에는 왜 미처 생각지 못했을까. 내내 당하고만 살았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모질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호달은 음식 냄새를 피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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