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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품는 곳

-진관사

by 이찬란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자락에는 천년의 고찰 진관사가 있다. 근엄한 소개와 달리 진관사는 연신내역에서 버스로 십 분이면 도착하는데다 걸어 올라가는 길도 단출해 의외로 편안한 방문지이다. 정류장에 내리면 시원하게 이어진 북한산의 능선과 한가롭고 조용한 은평한옥마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복잡한 시내 근처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나싶어 잠깐 어리둥절할 만한 광경이다. 한옥마을을 지나 1킬로미터 쯤 올라가면 바로 진관사다. 길 입구에 진관사 표지석과 ‘백초월길’이라고 씌여진 안내판도 보인다. 안내판에는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 이야기가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설명되어있다. 참 친절하다.

진관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인데 그 시작은 고려 8대 임금 현종과 진관대사로부터이다. 원래 이곳은 신혈사라는 작은 절로 승려 진관이 홀로 수도하던 곳이었다. 당시 왕태후의 암살 위협을 받던 어린 현종을 진관이 수미단 밑 굴에 숨겨 보호했다고 한다. 덕분에 무사히 왕위에 오른 현종이 보은의 뜻으로 신혈사 자리에 진관대사의 이름을 딴 사찰을 새로이 창건했다. 이후 진관사는 오랫동안 서울의 4대 명찰로 손꼽히며 그에 걸 맞는 역할을 해왔다.

고려시대에 임금들이 참배와 시주를 하고 조선 태조 때부터는 왕실수륙재를 지냈으며 세종은 이곳에 독서당을 짓고 한글창제를 위한 비밀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륙재는 수륙의 고혼과 아귀를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의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으로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관사에 산사음식 연구소가 있어 국내외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수륙재 때문일 것이다. 산사음식 연구소에서는 산사음식 강좌 및 체험이 수시로 진행되며 중국, 일본 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브라질, 불교의 나라 네팔의 스님들까지 방문하여 음식체험을 했다고 하니 보통 내공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정이 맞는다면 한번 체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조선시대 말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은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거점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진관사 칠성각에 숨겨놓은 태극기와 독립운동 사료가 90년 만에 발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들고 입장하여 화제가 되었던 진관사 태극기는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무늬를 덧그린 것으로 실제 독립운동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시와 은평구는 백초월 스님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은평한옥마을 입구에서 진관사에 이르는 길에 ‘백초월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했다. 버스에서 내려 마주친 안내판을 시작으로 태극기 비와 초월스님 사진, 태극기 이야기를 차례로 만나며 진관사 일주문에 이르렀다.

일주문을 통과해 왼쪽의 극락교를 건너면 마애 아미타불과 소나무가 아름답게 뻗은 룸비니동산이 보이고 진관사로 바로 이어진다. 조금 더 자연을 느끼고 싶다면 일주문 오른쪽 목책데크길로 걸어가 보아도 좋다. 진관사계곡의 물소리, 새소리를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크길 중간에는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으니 채비가 되어있다면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첫방문 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진관사는 비구니사찰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경내 곳곳이 아늑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져 있다. 봄, 여름이면 꽃터널이 될 것 같은 입구 산책길과 토기, 기와등을 활용한 화분에 색깔 맞춰 심어 놓은 식물들이며 맷돌모양의 징검돌까지 누군가의 섬세한 손길이 부지런히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대웅전으로 들어서기 전 완만한 오르막에 위치한 전통 차 카페 연지원은 이러한 정감에 분위기를 더한다. 비가 안개처럼 차분히 내리던 날 연지원 처마 밑에 맴돌던 전통음악과 사람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그 순간의 평온함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진관사를 ‘마음의 정원’이라 이름붙인 이유가 바로 그때문일까? 파라솔과 철제 테이블이 놓인 연지원 안마당과 마주하여 산사음식 연구소가 있다. 파릇한 머리의 비구니 스님들이 승복 소매를 걷고 마당을 오가고 있었다. 경박하지 않은 종종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니 가벼운 허기가 돌며 어린 시절 엄마 따라 절에 갔던 기억이 났다. 절의 이름이나 풍경, 앞뒤 상황 같은 것은 잘라낸 듯 말끔히 지워졌지만 입구가 넓은 국그릇에 맑게 끓여 담은 미역국과 밥만은 클로즈업된 사진처럼 생생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득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걸 보면 편식쟁이 꼬마의 입에도 절밥이 어지간히 맛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교회에 다니게 되어 같은 경험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새삼 아쉽게 느껴졌다.


연지원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진관사의 전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 때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이후 복원된 것으로, 복원할 당시 칠성각에서 백초월 스님의 태극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맵시 있게 가꾸어진 뜰을 둘러싸며 지붕을 맞댄 전각들 안에 서서 안락한 품에 안긴 아기가 된 기분에 젖어들 무렵 어디선가 불경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승려 뒤에 영정사진을 든 가족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나도 눈으로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일행은 원통형의 굴뚝같이 생긴 곳 앞에 멈추어 단을 차리고 차례로 나와 절을 했다. 절이 끝나자 단에 세워두었던 영정사진을 내려 불을 붙이고 굴뚝 안에 넣었다. 멀리서도 사진 속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가장자리부터 검게 그을리기 시작하던 얼굴은 이내 희뿌연 재가 되어 사그라들고 말았다. 고인과 이별하고 돌아서는 가족들의 표정이 애틋하고 헛헛해보여 내 마음도 잠시 가라앉았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곳에 다가가 짧게 명복을 빌고 돌아 나왔다.

낮은 담을 따라 걸어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절의 표정이 변했다. 오색빛깔 연등이 빼곡하게 매달린 홍제루와 생기 넘치는 식물들, 그 아래서 까르르 웃으며 뛰는 아이도 보인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왼쪽의 다리로 향했다. 세심교(洗心橋)라 써 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으라는 의미인가 보다. 세심교를 건너면 템플스테이관인 함월당이 있다. 수수한 빛깔의 옷을 입은 체험객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의복과 장소에 따라 마음가짐도 변하는 것인지 하나같이 발걸음이 다소곳하다. 함월당에서 아래쪽으로 난 돌계단을 내려와 아담한 정원 벤치에서 가방에 든 떡과 차로 간단한 요기를 했다. 나 역시 장소에 동화된 것인지 푸짐한 밥상이 아니어도 마음이 흡족했다.

진관사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 입구에서 그냥 지나쳤던 룸비니 동산에 올랐다. 줄지어 가지런히 놓인 징검돌을 하나씩 밟으며 소나무가 자유분방하게 뻗어 있는 잔디밭으로 들어가자 가슴이 확 트였다. 잘 다듬어진 잔디와 화단처럼 모양을 맞추어 세워놓은 돌단에서도 역시 누군가의 정성이 느껴졌다. 그 위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와 앉았다. 뭐 먹을 것이 있이 있는지 연신 바닥을 쪼느라 바쁘다. 내가 살그머니 옆으로 다가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 혹시 놀라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이며 더 가까이 가 보았지만 슬쩍 경계만 할 뿐 여전히 모른 척이다. 그 상황이 재미있어 나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녀석을 구경했다. 이번엔 마음 말랑말랑 간질간질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진관사를 그저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오랜 세월에 걸쳐 생명을 살리고, 먹이고, 길러서 자연으로 돌려보낸 뒤 또 다른 생명을 품는 불교의 도리를 아주 조금 맛본 것 같아 겸손해졌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소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아직도 더 자라려는지 비늘을 벗은 소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이 글은 2020년 은평문화재단 《지역문화네트워크 프로젝트》 '우리동네 숨은 명소 발굴하기'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www.efac.or.kr/mobile/sub06/sub09_1.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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