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로 오르기 전 백초월길 초입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은평한옥마을이 있다. 푸른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추녀 끝을 살짝 들어 올린 기와지붕들. 그 부드러운 곡선이 미소 짓는 입 꼬리처럼 방문객을 조용히 반긴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러나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옥마을이 그 지역의 고택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반면 은평한옥마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지금은 한옥마을이 된 은평구 진관동 일대는 197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던 탓에 주거환경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2002년 은평이 시범뉴타운지구로 선정되고, 10년 후인 2012년에 SH공사가 주거 목적의 한옥마을 개발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기간과 분양기간까지 따져보면 사실상 이제 막 생긴 마을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익히 봐 왔던 북촌이나 전주 한옥마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반듯하고 널찍하게 정비된 도로와 주차장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독특하게 디자인한 담장이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한옥의 형태였다. 우리나라 전통 한옥은 단층 건물 여러 채를 이어 붙인 모습으로 멀리서 보면 지붕선이 나란히 이어져있지만 이곳은 대부분의 한옥이 2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뉴타운인 만큼 좁은 필지의 효율성과 입주민의 실 거주를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2층을 둘러싼 나무 발코니는 옛 한옥의 누마루를 연상시켜 부담스럽지 않다. 저마다 높이가 다른 처마와 석회벽과 목재를 혼합한 외관은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한 리듬감을 연출한다. 어찌 보면 한옥의 멋에 기능을 더한 현대적 재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은평한옥마을 안에는 서울시와 국토부등에서 선정한 우수한옥과 한옥 리모델링 및 건축을 하는 사무소도 들어서 있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이제 막 기둥과 지붕을 올리고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 집이 보였다. 분주히 움직이는 인부들의 눈치를 보며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안을 기웃거렸다. 콘크리트 벽 대신 나무로 둘러싸인 집에 누워있는 상상만으로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조차 자연은 본능적인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가 보다.
애초에 주거지로 조성된 마을이지만 방문객이 점차 늘어나면서 은평한옥마을 안에는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북한산 한문화체험특구’로써 꾸준한 지역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의 둘레길과 진관사, 은평역사한옥 박물관, 삼각산 금암미술관, 셋이서 문학관, 너나들이센터, 그리고 멋진 뷰를 자랑하는 카페와 레스토랑까지 한옥마을 주변에는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제법 많다.
지금은 외벽보수공사로 휴관중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은평구의 역사와 한옥의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관과 상설전시실, 다양한 기획전시를 진행하는 전시실과 북한산 전망대를 갖추고 있어 한옥마을을 둘러보기 전 들러보면 좋을 만하다. 삼각산 금암미술관은 원래 SH공사 한옥시범주택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나 2018년에 미술관으로 개관하여 색다른 한문화 전시·체험을 주로 한다. 미술관과 쪽문으로 연결된 셋이서 문학관 역시 볼거리가 많다. 시인 천상병, 중광 스님, 소설가 이외수의 작품세계와 문학론을 전시하는 이곳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문학 강좌도 진행한다. 한옥마을 입구의 너나들이센터에서는 실제 응암동에 있던 고려사진관의 자료 일체를 기증받아 재현해 놓은 추억의 사진관이 있으며 다양한 한복과 소품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체험관도 운영 중이다. 한 곳 한 곳 꼼꼼히 둘러보자면 하루가 부족 할 만큼 알찬 방문지이다. 다행히 서울 안에 있으니 일부러 계획을 잡지 않아도 다녀오기에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역사체험, 문화체험, 생태체험, 혹은 가벼운 나들이로 여러 번 나누어 방문할 수 있고 한옥스테이를 겸한다면 은평한옥마을과 북한산의 매력에 온종일 푹 빠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옥마을은 생긴 지 얼마 안됐지만 마을을 둘러싼 자연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다. 북한산 둘레길과 이어지는 한옥마을 옆 마실길 근린공원의 노목을 보면 길고 긴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공원 안에는 수령이 120~22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가 네그루 있는데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자태였다. 옆으로 넓게 구부러져 뻗은 가지에 받침목을 대 놓은 것이 꼭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같아 발걸음이 공손해졌다. 가까이 다가가 울툭불툭 튀어나온 줄기와 그 아래 수평으로 잡힌 주름, 수분이 빠져나가 얇은 살비듬처럼 일어난 나무의 피부를 말없이 한참 바라보았다. 한때는 저마다의 소원을 안고 진관사로 향하던 불자들과 개천에서 뛰놀던 동네 아이들, 크고 작은 생물들에게 든든한 휴식처가 되어주었을 느티나무는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칠 나이가 된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생각을 할 것만 같은 신령스러움이 느껴졌다. 나무를 둘러싼 데크를 돌아 나오다보니 도심생물다양성 습지와 맹꽁이 서식지 안내판이 보였다.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을 지정해 사람과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덕분에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이 더욱 살아나는 것 같았다.
구경을 마치고 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 창가자리에 앉았다. 아담한 나무 소반에 정갈하게 차려진 차와 떡을 마주하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옆자리에는 어린 손주를 데리고 마실 온 할아버지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작은 입에 떡을 잘라 넣어주느라 바빴다. 보는 사람도 절로 따라 웃게 되는 광경이었다. 은평한옥마을에서 자연과 사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딱 그만큼만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를 바라며 근린공원에서 마주한 느티나무를 떠올렸다.
*이 글은 2020년 은평문화재단 《지역문화네트워크 프로젝트》 '우리동네 숨은 명소 발굴하기'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