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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Nov 25. 2023

시작하는 글

나를 배웅하는 시간

저녁 여섯 시 반에 퇴근을 하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씽씽 달려간다. 페달 밟는 속도만큼 쏟아지는 바람을 들이켜며 그야말로 씽씽 달린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엘리베이터에서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하며 숨을 고르고 현관문을 열면 고요하고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안기듯 흡족한 기분으로 그 안에 와락 뛰어든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였나 엄마는 틈만 나면 우리 세 자매에게 “어서 커서 시집 가 버려라.”하고 말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내놓는 세 벌씩의 흰 양말과 내의를 모아 삶거나 수북한 설거지를 빠르게 해치우고 어질러진 거실에 엎드려 걸레질할 때도 그 말을 주문이나 간절한 염원처럼 되풀이했다. 하지만 결혼을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고 서로 치고받고 뒹구는 데 여념이 없었으므로 그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엄마가 나처럼 혼자 있는 걸 좋아하나 보다, 라고 간간이 생각했다. 나는 언니와 동생을 피해 안방의 열두 자짜리 자개장롱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 숨는 걸 좋아했다. 그 자리에 있는 키 큰 옷걸이를 밖으로 조금 밀어내면 아이 한 명이 들어가 앉기 딱 알맞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옷걸이에 길게 걸린 옷이 커튼 역할을 해 분위기도 무척 아늑했다. 그곳으로 책을 들고 들어가 누군가 찾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내 습관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안으로 기어들며 옷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종종 잠드는 바람에 끌어내려면 불필요한 힘을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에 엄마는 여러 가지 이유로 늘 지쳐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딸들의 시집에 대한 염원은 점점 커지는 듯했다. 이십 년 전 첫 번째 연애 상대와 별다른 고민 없이 결혼을 한 건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렁뚱땅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야 나는 마법에 걸렸다 풀려난 사람처럼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하나뿐인 집은 오로지 그의 움직임만을 기억한다. 샤워로 먼지와 땀을 씻어낸 뒤 맑아진 눈으로 집안을 둘러본다. 거실 테이블에 쌓아둔 책과 노트북, 커피잔이 오전에 놓아둔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진녹색 의자 하나가 테이블과 거리를 두고 비뚤게 놓여 있다. 거실의 육 인용 테이블은 내가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이다. 제각기 다른 모양의 의자 세 개를 두고 번갈아 가며 사용하지만 팔걸이가 높고 좌석이 넓은 진녹색 의자에 주로 앉는 편이다. 아마 출근 전까지도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밀어둔 모양이다. 테이블 근처에 서서 과거의 나를, 너무 가까워서 미처 과거로 보내지 못한 모습을 더듬어 본다. 노트북을 켠 채 자판을 누르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독서대에 프린트해 겹겹이 쌓아둔 똑같은 제목의 습작 소설을 뒤적이며 머리를 긁적이는 나. 참고용으로 쌓아둔 책더미에서 책 하나를 뽑아 읽는 도중, 내린 지 오래돼 식은 커피를 인상 써가며 굳이 마시는 내가 잔상처럼 떠오른다. 나는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고, 들고 나갈 쓰레기가 없는지 확인하고, 불을 끈 뒤 현관으로 향한다. 나가는 순간은 늘 분주하다. 그래서 밀어놓은 의자는 집어넣지 못한다. 오전에 밀어둔 의자에 앉아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내 뒷모습을 본다. 또로록, 도어락 잠기는 소리와 함께 미처 떠나지 못했던 내가 과거로 사라지고 현재의 나만 남는다. 이제 하루 중 가장 안온한 시간이다.     



전남편과의 이혼을 완료하던 이 년 전 칠월에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시작부터 지나치게 뜨거웠던 그가 불편했으면서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은 것과 오래 미룬 숙제를 해치우듯 결혼을 한 것, 그러기 위해 실은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솔직히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 나는 애초에 혼자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고, 결혼하고 나서야 그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가 말하지 못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도 나처럼 알면서 모르는 척 꾸역꾸역 살아왔는지 모른다. 때로 사람은 자신이 한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그대로 두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어쩔 수 없다.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법이고 과거는 과거로 보내주어야 한다. 오늘 저녁도 나는 가장 좋아하는 진녹색 의자에 팔을 걸치고 앉아 오늘과 어제, 몇 년 전과 몇십 년 전의 나를 끊임없이 과거로 배웅하는 중이다. 


* 매거진에 연재했던 글은 책 <나의 경우엔 이혼이라기보다 독립> 으로 출판하였기에 일부만 남기고 발행 취소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bookk.co.kr/bookStore/6596c677c89be20029581c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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